비타협적 민족주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 非妥協的 民族主義 ]

요약 일제 강점의 현실을 민족 대립 구도로 파악하고, 일제에 맞서 정치적 독립을 지향한 민족주의 세력.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절대 독립’의 구호 속에 밀려 있었던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의 구호가 다시 민족운동의 전면에 등장했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문화통치(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합법적인 공간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민족 역량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추진한 민립대학설립운동물산장려운동이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운동의 성격이 점차 변질되었다. 일제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조선인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자치운동(自治運動)’의 흐름이 등장한 것이다.

1924년 1월 이광수(李光洙)가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에서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 이 결사로 하여금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장래 구원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게 할 것”이라는 자치운동의 주장을 발표하면서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주장은 민족자결과 독립이라는 민족주의의 근본적인 토대를 부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타협적 자치운동에 맞서 민족 자주와 민족 자강을 지향하는 민족주의 사상, 운동 노선인 ‘비타협적 민족주의’가 대두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일제 강점의 현실을 민족 간의 대립 구도로 파악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성을 견지하면서 절대 독립을 추구하였다. 그 중심에는 홍명희(洪命熹), 신석우(申錫雨), 안재홍(安在鴻) 등 《조선일보》 계열과 권동진(權東鎭) 등의 천도교 구파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민족협동전선’을 모색하였고, 민족해방을 최우선의 목표로 공유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였다. 신간회 정강에 명시된 ‘모든 기회주의 부인’은 바로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타협, 협력을 배격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930년대 신간회가 해소되고, 일제의 파시즘적 통제가 강화되는 현실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차선책으로서 문화운동을 통해 독자적 민족 문화를 강조하고, 민족의식을 확립하는데 주력하였다.

참조항목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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