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팔령

관극팔령

[ 觀劇八令 ]

〈관극팔령(觀劇八令)〉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판소리춘향가〉, 〈흥보가〉, 〈장끼타령〉, 〈수궁가〉, 〈적벽가〉, 〈배비장전〉, 〈심청가〉, 〈변강쇠타령〉의 여덟 마당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전 시기에 지어진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觀優戱)〉에서 열두 마당을 다루었던 것과 비교 가능한 작품으로, 19세기 판소리 문화 및 한국 연희사를 조망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지은 이유원은 순조-고종대의 문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이다. 어려서 박기수(朴綺壽, 1774-1845) 문하에서 공부하며, 학문적·정신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6세에 초시, 24세에 진사시를 거쳐 28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해 홍문관교서관(弘文館校書館), 주서(主書)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그 와중인 서른 살 무렵, 가오곡에 별장을 마련하고 귀거래를 꿈꾸었다. 그는 벗들과 천일정(天一亭)에 뱃놀이를 나가고, 장씨원에서 시회를 여는 등 풍류를 즐겼다. 이후 32세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연경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옹방강의 사위이자 유명한 학자였던 섭지선(葉志詵)을 비롯해 많은 중국 문인들과 교유했다.

이유원은 의주부윤, 전라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황해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등을 거쳐 좌의정, 영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30세 때의 다짐을 잊지 않고, 1859년 46세 되던 해 가오곡으로 이사해 귀거래의 꿈을 이루었다. 다만 관직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부임지와 가오곡을 오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1869년을 전후로 『수초록』을 지었고, 1872년을 전후로 자신의 시문집인 『가오고략(嘉梧藁略)』을 집필했다. 1884년에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 문물을 두루 다룬 대작인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드디어 완성했으며, 4년 뒤인 1888년에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유원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두고 매우 아꼈던 고종은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그는 음악, 그림, 서예 등 다양한 예술 영역에 걸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특히 그의 악부는 우리나라 악부사에서도 높이 평가되는데, 창작은 물론 다양한 악부의 장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업적을 남겼다.

『가오고략』 중 〈관극팔령〉을 비롯해, 〈해동악부(海東樂府)〉, 〈보제산악(補製散樂)〉, 〈속악십육가사(俗樂十六歌詞)〉, 〈소악부(小樂府)〉, 〈영산선성 오장(靈山先聲五章)〉, 〈시여 이십육조 오십사결(詩餘二十六調五十四闋)〉 등은 특히 당대 음악에 대한 이유원의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고수관, 송흥록, 모흥갑, 김용운 등 네 명의 노래를 다 들었다. 고씨는 팔십에도 노래를 할 수 있었으며 김씨는 가락이 가사(歌詞)에 가까웠으므로 신위가 칭찬한 듯하다. 염계달의 노래를 가장 뒤에 들었으나 네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한때에 이름이 났는데, 세상에서는 모씨의 노래를 가장 좋다고 한다"라는 내용의 『임하필기』 기록으로부터 판소리에 대한 그의 감식안을 엿볼 수도 있다.

〈관극팔령〉은 1871년을 전후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저작 연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차례로 〈광한춘 제일령(廣寒春第一令)〉은 〈춘향가〉, 〈연자포 제이령(燕子匏第二令)〉은 〈흥보가〉, 〈예여장 제삼령(艾如帳第三令)〉은 〈장끼타령〉, 〈중산군 제사령(中山君第四令)〉은 〈수궁가〉, 〈삼절일 제오령(三絶一第五令)〉은 〈적벽가〉, 〈아영랑 제육령(阿英娘第六令)〉은 〈배비장전〉, 〈화중아 제칠령(花中兒第七令)〉은 〈심청가〉, 〈광쇠 제팔령(光釗第八令)〉은 〈변강쇠타령〉을 각각 칠언절구의 한시로 축약한 것이다. 전 시기에 창작된 송만재의 〈관우희〉가 〈춘향가〉의 절개, 〈흥보가〉의 우애, 〈수궁가〉의 충성, 〈심청가〉의 효성 등 유교적 윤리관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이라면, 이유원의 〈관극팔령〉은 그보다 보편적인 인간사에 관심을 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춘향가〉에서는 만남과 헤어짐, 〈흥보가〉에서는 가난과 부유함, 〈수궁가〉에서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긍정, 〈심청가〉에서는 재화의 위력 등을 포착했던 것이다. 〈관극팔령〉으로부터 작품과 대상을 일정한 거리에 두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며 작품을 재해석하는 이유원의 적극적인 시작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윤광봉, 『(개정판) 한국연희시연구』, 박이정, 1997.
  • 장석규, 「관우희·관극팔령의 창작방법과 송만재·이유원의 작가의식」, 『문학과 언어』 12, 문학과 언어연구회,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