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늦바람이 용마름을 벗긴다

우리집 낭군은 고기잡이를 갔는데
바람아, 강풍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

이런 민요가 있다. 고기잡이를 간 남편이 돌아올 수 없게 강풍이 불기를 빌고 있는 노래다. 여인이 바람이 난 것이다. 새 연인과 사랑을 나누려면 남편이 방해가 된다. 그래서 남편이 불귀(不歸)의 객이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참으로 사랑은 귀한 것이나, 모진 것임에 틀림없다.

공기의 유동(流動)을 ‘바람’이라 한다. 그러나 바람에는 이러한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녀 관계로 생기는 들뜬 마음이나 행동’도 바람이라 한다. 위의 민요의 주인공과 같은 경우를 우리는 ‘바람이 났다’고 한다. ‘병이 났다’, ‘탈이 났다’와 같이 ‘바람이 발생했다’는 말이다. 이런 바람을 일본어로는 ‘우와키(浮氣)’라 한다. ‘들뜬 기운, 들뜬 마음’이란 말이겠다. 그런가 하면 바람은 풍병(風病) · 중풍(中風)을 가리키기도 한다. 중풍에 걸린 것을 ‘바람 맞았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본 『춘향전』에 보이는 “저 춘향이 거동 보소. 검은 머리 집어 꽂고, 때묻은 헌 저고리 의복 형상 검게 하고, 짚신짝을 감발하고 바람 맞은 병신 같이, 죽으러 가는 양의 걸음으로 석양 먼 개에 짝잃은 원앙이오, 봄바람 따스한 날에 꽃을 잃은 나비로다.”의 ‘바람 맞은 병신 같이’가 그 예이다. 바람은 또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일시적인 유행이나 분위기 또는 사상적 경향 등을 의미한다. ‘머리에 물들이는 바람’,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바람은 이밖에도 다양한 뜻을 지닌 다의어(多義語)다.

‘바람’과 관련된 말은 여러 가지가 있다. 바람이 이는 장소, 계절, 시각, 바람의 성격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리 일러진다. 이러한 다양한 바람은 바로 그 언어사회의 문화를 반영한다.

바람은 우선 풍향에 따라 달리 일러진다. ‘샛바람(東風), 하늬바람(西風), 마파람(南風), 뒤바람(北風), 갈바람(西風), 갈마바람(南西風)’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는 본래 뱃사람들이 이르던 말이다. ‘새, 하늬, 마, 뒤’는 동서남북을 이르는 우리의 고유어이다. ‘윗바람, 아랫바람’은 물의 상류와 하류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도 연을 날릴 때에는 각각 서풍과 동풍을 나타낸다.

바람은 불어오는 장소에 따라 ‘강바람, 갯바람, 골바람, 들바람, 문바람, 물바람, 바닷바람, 벌바람, 산바람’과 같이 다양하게 구분된다. ‘갯바람’은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짭짤한 바람이다. 시원한 바닷바람과는 차이가 난다. ‘골바람’은 골짜기에서 산 위로 부는 바람이고, ‘들바람’은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문바람’은 문이나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다. 문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고 한다. ‘물바람’은 강이나 바다 따위의 물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벌바람’은 벌판에서 부는 바람이다.

불어오는 장소에 따른 바람은 이 밖에 ‘꽁무니바람, 몽고바람, 바깥바람, 손바람, 속바람’과 같은 것이 있다. ‘꽁무니바람’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뜻하고, ‘몽고바람’은 몽고(蒙古)의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리킨다. 봄에 황사를 날라오는 바람은 이 몽고바람이다. ‘바깥바람’은 바깥에서 부는 바람을 뜻한다. 이는 또 바깥 세상의 기운이나 흐름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외국의 풍물을 접하고 들어왔을 때 ‘바깥바람을 쐬고 왔다’고 한다.

‘손바람’은 손을 흔들어 내는 바람이다. 이는 일을 치러 내는 솜씨나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속바람’은 몹시 지친 때에 숨이 차서 숨결이 고르지 못하고 몸이 떨리는 현상을 말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속바람이 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에 보이는 ‘연산(燕山)은 분함을 못 이기어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속바람이 일어날 듯하다’에 보이는 ‘속바람’이 이러한 것이다. 이는 몸 속에서 이는 바람이란 뜻으로 명명한 말이라 하겠다.

바람은 계절에 따라 ‘봄바람, 가을바람, 겨울바람, 피죽바람, 박초바람’과 같이 일러지기도 한다. ‘피죽바람’이란 ‘피죽도 먹기 어렵게 흉년이 들 바람’이라는 뜻으로, 모낼 무렵 오래 계속하여 부는 아침 동풍과 저녁 서풍을 말한다. 요사이는 ‘피죽바람’ 아닌, 90년만의 ‘가뭄’이 들어 피죽도 먹기 어려운 흉년이 들지 않을까 염려된다. ‘피죽’이란 피로 쑨 죽으로, 굶은 사람처럼 맥이 없고 비슬거릴 때 ‘피죽도 못 먹었나?’라고 조롱하듯, 조악한 음식의 대표격인 것이다. ‘박초바람’이란 한자말로 ‘박초풍(舶趠風)’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는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바람’이란 뜻으로, 음력 오월에 부는 바람이다.

‘늦바람, 밤바람, 새벽바람’은 바람이 부는 시각과 관련된 것이다. ‘늦바람’은 저녁 늦게 부는 바람이다. 뱃사람의 은어로는 ‘느리게 부는 바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나이 들어 늦게 난 난봉이나 호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늦바람이 용마름을 벗긴다”는 속담의 ‘늦바람’이 그 예이다. 이는 늦게 불기 시작한 바람이 초가집 용마름을 벗겨 갈 만큼 세다는 뜻으로, 사람이 늙어서 바람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사람도 늦바람이 무섭다”가 바로 이런 속담이다.

사람은 일생에 한번은 바람을 피운다고 한다. 그래서 바람을 피운다면 늦게 피우는 것보다 일찍 피우는 것이 낫다고 한다. 걷잡을 수 없어 가정의 파탄을 몰아 오는 불상사를 피하자는 심정에서다. 그러나 사랑이 이성(理性)이 아닌 감성에 의해 싹트는 것이고 보면, 그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이 들어서 바람 피우는 사람은 ‘늦바람둥이’라 한다.

요사이는 ‘늦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황혼이혼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여성해방에 있는 것 같다. 세태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사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