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

단성사

[ 團成社 ]

요약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사설극장의 하나.

지명근·주수영·박태일 등의 공동출자로 1907년 설립 당시부터 1910년대 전반기만 해도 단성사는 광무대(光武臺)나 장안사(長安社) 및 연흥사(演興社)처럼 전통연희를 주된 공연종목으로 삼았다. 즉 단성사는 판소리·민요·민속춤·전통음악·재담·무속 등 전통연희의 전문극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12년부터는 개량한 연희인 신연극을 전문으로 공연한 강선루일행(降仙樓一行)을 단성사의 전속단체로 두고 기존의 유영갑(柳泳甲)이나 박춘재(朴春載)의 재담과 성주푸리 같은 종목을 없애고, 그 대신에 기악과 무용을 주요 공연종목으로 삼았다. 환등(幻燈)을 개량연희에 포함시켰다.

1930년대 단성사(경성) 극장 건물의 앞모습

1930년대 단성사(경성) 극장 건물의 앞모습

강선루일행의 신문광고(매일신보 1912년 4월 21일자)

강선루일행의 신문광고(매일신보 1912년 4월 21일자)

1914년 극장의 외부를 서구식으로 또 내부를 일본식으로 바꾼 단성사의 신축기념공연 때 궁중정재(宮中呈才)와 민간무용을 공연하였다. 1915년 2월 실화 때문에 단성사를 임시로 수리해 공연장으로 사용하다가 결국 1917년 2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간 단성사는 수익성이 높은 영화관(映畵館)으로 탈바꿈하였다.

1920년에는 경성의 네 권번한성권번(漢城券番)·대정권번(大正券番)·경화권번(京和券番)·한남권번(漢南券番)의 연합연주회 때 다양한 공연종목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박승필(朴承弼)의 신념에 따라 1920년대부터는 단성사를 영화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전통연희와 신극의 공연장으로도 자주 개방하였다.

1931년에는 박승필이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의 2회 공연을 단성사에서 개최하도록 허락했다. 1932년 박승필이 타계할 때까지 전통연희를 단성사의 무대에서 간간히 공연하였다.

참고문헌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32~33, 607~6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