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흥사

연흥사

[ 演興社 ]

요약 일제강점기 설립된 사설극장의 하나.

연흥사는 창립 당시 지금의 서울 인사동(仁寺洞)에 자리잡고 있었던 가설극장이었다. 1907년(隆熙 1) 11월에 설립된 연흥사는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저택에서 개설됐다. 창극 화용도(華容道)의 공연을 위하여 30여명의 창부(倡夫)를 모집했다는 기사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5월 6일자에 나온다.

이 당시 연흥사의 책임자인 박완근(朴完根) 총무와 송종오(宋鍾五) 감독은 다른 사설극장처럼 ·창극·평양 날탕패, 그리고 의 무용과 민요로 공연 프로그램을 짰다. 당시 연흥사는 (光武臺)나 (長安社)처럼 초창기에는 광대와 기생의 민속예능이나 전통연희로 프로그램을 짜서 공연하였다. 1910년대에 이르러 연흥사는 화희(火戲)와 연화술(煙火術)까지 무대에 올려서 관객을 동원했고, 1912년에는 신파극단(新派劇團)을 받아들였다.

1912년부터 1930년까지 (金昌龍)이 주관한 연흥사는 ·· 등을 공연하였다. 1912년 용성사일행이 연흥사에서 전통연희를 공연하여 관객을 끌어들였다. 1913년부터는 신파극단 혁신단(革新團)의 임성구일행(林聖九一行)이 연흥사를 주무대로 삼게 됨으로 말미암아, 연흥사가 신파극의 본거지로 변해버렸다. 신극파의 인기작품으로 연흥사가 흥행에 성공했으나, 1914년 10월 8일 돌연 문을 닫았다.

이 극장에서 출연한 명인명창은 김창룡·····김광순·· 등이었다. 1916년 송만갑이 창극화한 ·춘향전·심청전이 연흥사에서 공연됐다. 연흥사의 창극공연은 백포장을 두르고 하던 시절과 달리 제대로 소도구를 갖춘 공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흥사의 창극 흥행은 그 당시의 신파극이나 활동사진에 밀려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18년 송만갑은 연흥사와의 인연을 끊고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를 조직하여 지방공연에 나섰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4.1553~54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32~33, 607쪽
  • 『文藝總鑑』,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년, 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