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여주장

여주군-여주장

분류 정치/경제/생업 > 전국의 재래시장 > 장터순례(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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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여주군

날짜

5,10,15,20,25,30

특산물

쌀,고추,마늘,참깨,채소류,의류,어류,그릇,신발,잡곡,잡화류일체

시장소개

- 여주 5일장의 유래 -

여주장에 대하여 옛 문헌에 기록된 것은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시장이 없는곳에 장이 생기기 시작하여 생활필수품을 거래하게 되었고 쌀,금,은등이 화폐의 대행을 이루는 물물 교환이 성행하여 정책적으로 교환율을 정하기도 했고 폭리에 대해서는 사법제도를 만들어 범법자를 처벌하기도 했는데 그당시 여주의 생산처로서 지금의 대신면 지역에 등신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나 생산품이 무엇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그 외에 방근곡처(점동면 처리), 신지리(능서면 신지리), 신근리(흥천면 신근리)등이 있었다. 조선초 농본정책이 중시되고 상업이 억제되었으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사행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지방의 시장도 그 수효가 증가하여 점차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한강의 이용수단이 생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관선, 병선, 사선이 생기게 되었다. 세종년간에 들어오면서 여주 양화군에는 정조250석 적재적량의 조선이 15척, 그 이하 사선포함 20여척이 있어 이때 이미 상공업이나 교통이 고도로 발달했던 것 같다. 한강을 이용한 상선들은 주로 농산물, 임산물을 수송해 가고, 올때는 해산물(생선, 새우젖, 소금)을 외지에서 수입해왔다. 이것이 여주 최초의 시장인 양화장이다.

- 여주 5일장의 변천사 -

조선시대에 여주의 시장분포 사항을 살펴보면 여주장, 천령장(천양장이라 부름)과 억억장(후에 흥천장)이 제일 먼저 생기고 가장 번성하였다. 그 다음으로 안평장(후에 청안리로 옮김) 곡수장, 궁리장(금사면 궁리)등이 생겼고 그후에 다시 태평리장이 생겼다. 해방 후에는 대신장, 북내장, 주암장, 상품장 등이 생겼으나 해방후에 생긴 시장은 몇 년 후에 폐장되었다. 이곳에서 외지로 수출되는 수출품은 도자기 이외에 가내공업품으로 한지, 자리, 약초류에 불과했음. 1965년도에는 시장수가 11개였고 70년대 이르러 여러종류의 잡화를 다루는 도매업 소매업등의 상점이 늘어나 시장수가 줄어 현재의 가남장과 대신장, 여주장만 서고 있으나 여주장은 그 규모가 다른장에 비할데 없다.

※ 자료참조 : 한국관광공사 여행정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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