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렬사

창렬사

[ 彰烈祠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삼학사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위패를 모신 곳. 1979년 12월 19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창렬사

창렬사

지정종목 충청남도 기념물
지정일 1979년 12월 19일
관리단체 유림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금사남로 78 (금사리)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크기 면적 1,226㎡

1979년 12월 19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九龍面) 금사리에 있다. 1717년(숙종 43)에 창건되었으며, 1721년(경종 1) 사액서원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벗어난 잔존사우이다. 총 면적은 1,226㎡이다.

정전은 동향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앞뒤로 지붕이 구성된 지붕)이고, 앞과 뒤에 툇간이 있다. 앞에는 ‘彰烈祠’이라는 사액 현판이 달린 내삼문이 있고, 아래쪽에 강당이 있다. ‘蹈海祠’라 명명된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오른쪽과 왼쪽 측면에 합각되어 있는 지붕)이고, 앞에 외삼문이 있다.

삼학사인 윤집(尹集:1606~1637), 오달제(吳達濟:1609~1637), 홍익한(洪翼漢:1586~1637)은 병자호란 때 청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최명길(崔鳴吉) 등은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삼학사는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주장하였는데 1637년(인조 15) 1월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세 사람은 척화신(斥和臣)으로 심양(瀋陽)에 잡혀가 모진 고문 끝에 참형당하였다.

역참조항목

금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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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창렬사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충청남도 기념물 제22호 조선 중기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자 이를 반대했던 세명의 신하를 배향하는 사당이다. 윤집과 오달제, 홍익한은 스스로 척화론자를 자청하여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창렬사가 세워졌다. 창렬사 사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지어졌으며 내삼문 밖에 팔작지붕의 강당이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앞에는 구룡천이 흐른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