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서원

강성서원

[ 江城書院 ]

요약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 문익점(文益漸:1331~1400)과 조선 중기의 의병장 문위세(文緯世:1534∼1600)를 배향하는 서원.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강성서원

강성서원

지정종목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지정일 1984년 2월 29일
관리단체 강성서원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산365-1,677-2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늑룡리에 있다가 장흥댐 건설로 2004년 4월에 신풍리로 옮겨왔다.

원래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문위세를 향사하기 위하여 1644년(인조 22) 월천사(月川祠)를 세운 데에서 비롯되었다. 1702년(숙종 28) 사우로서의 건립절차와 규모를 새로 마련하였고, 1734년(영조 10)에는 문익점을 추배하면서 그를 주벽으로 하고 문위세를 배향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전라도 유생 600여 명이 이들의 공덕을 흠모하여 사액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에 조정에서 강성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그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고 1894년 후손 문정원·문욱호 등이 설단하였다가 1905년에 강당을 중수하였다. 1929년에는 신실(숭덕사)을 중건하였다.

문익점의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순유박사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의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로 등용되고,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에 반대하여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밀려났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문위세의 본관은 남평이고, 자는 숙장(叔章), 호는 풍암(楓庵)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조달 등의 공을 세웠고, 1595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읍민을 동원,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1600년 파주목사에 임명되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병조참판이 추증되었다.

신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전면 반칸을 툇간으로 개방하였다. 양쪽 박공면에는 바람막이판을 설치하였고 처마는 겹처마로 꾸몄다. 가구는 1고주 5량가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내·외삼문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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