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영정

풍영정

[ 風詠亭 ]

요약 1560년 관직에서 물러난 김언거가 낙향하여 지은 정자. 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영정

풍영정

지정종목 광주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지정일 1984년 2월 29일
관리단체 광산김씨문중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풍영정길 21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있다.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이다.

풍영정은 1560년(명종 15)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金彦据)가 지은 정자이다. 여기서 그는 72세로 죽을 때까지 10여년 간을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등 많은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 풍영정에 남아 있는 이들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은 이때의 흔적이다. 또한, 여기에는 명필 한석봉(韓石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扁額)도 걸려 있다.

풍영정 원운(原韻)은 병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 이 곳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그의 6대손 광주목사(光州牧使) 조진민(趙鎭敏)이 새겨 걸었다. 1948년 후손들이 지붕을 수리하였는데, 당시의 기록이 풍영정수리후추모서실(風詠亭修理後追慕敍實) 현판으로 남아 있다.

김언거(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이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옥당(玉堂)에 뽑혀 교리(校理)·응교(應校)·봉사시정(奉史侍正) 등의 내직(內職)을 거쳐 상주(尙州)·연안(延安) 등의 군수를 지냈다.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김언거는 덕망이 높아 낙향을 하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가 지낼 정각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도화동 옆 현봉에서 풍영정에 이르는 신창3동 뒷동산 500m 남짓되는 거리에 12채나 되는 정각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풍영정 이외의 11채의 정각들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풍영정만 남았다.

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 가운데 앞의 〈풍〉자가 오리로 변하여 극락강 위로 날아올랐다.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현재 정각에 걸린 현판의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풍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김언거의 저서로는 《죽와휘어(竹窩暉語)》 《송사절요(宋史節要)》 《역대명신간소초(歷代名臣諫蔬抄)》 《가례초(家禮抄)》 등이 있다.

참조항목

광산구, 누정

역참조항목

신가동, 신창동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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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풍영정 광주광역시에 있는 조선중기 때 정자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조선 중기인 1560년 한양에서 관직을 마치고 낙향한 칠계 김언거가 지은 정자로 영산강을 내려다 보는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풍영정은 주변의 뛰어난 풍광과 함께 절경으로 알려져 영산강 8경 중에서 7경으로 불린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단청은 하지않고 난간을 둘렀다. 고향으로 낙향한 김언거는 성리학의 대가였던 기대승, 이황 등과 교우하였으며 그 흔적이 풍영정에 걸린 현판에 남아있다. 특히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은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글씨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