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김인후

[ 金麟厚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장성 김인후 신도비

장성 김인후 신도비

출생-사망 1510 ~ 1560
본관 울산
후지
하서·담재
시호 문정
주요저서 《하서전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5대조 김온(金穩)은 서울에서 살았으나 세자 책봉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가족들은 전라도 장성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부친은 종9품의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 총명했으며 당시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에게도 지도를 받았다. 1528년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쳤고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는데 인종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아 한때 술과 시로 방황하였다고 전한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