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한국회화

조선시대의 한국회화

서총대친림연회도

서총대친림연회도

조선시대(1392~1910)는 한국 미술 역사상 회화가 가장 발달한 때로서 도화서를 통해 배출된 뛰어난 화원들과 사대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조선 전기 회화의 정립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통해 회화의 경지를 끌어올린 안견(安堅)을 비롯 사대부 출신으로 절파화풍을 수용한 강희안(姜希顔), 안평대군, 천민 출신으로 남송 원체화풍을 받아들여 뛰어난 회화적 경지를 발판으로 신분상승한 이상좌(李上佐), 종실 출신으로 영모화에 능했던 이암(李巖) 등에 의해 이뤄졌으며, 그 밖에 이장손(李長孫) ·최숙창(崔叔昌)과 같은 화가는 미법산수(米法山水)의 세계를 보여준다.

왜란과 호란 등의 전란에 의해 전국토가 유린당한 조선 중기에도 안견화풍이 계승되었으며, 한편으로 강희안에 의해 시험된 절파화풍이 확산되었다. 즉, 이상좌의 아들 이숭효(李崇孝)는 절파화풍의 인물화와 영모화를 잘 그렸으나 요절하였고, 그의 아들 이정(李楨) 역시 가계를 계승하여 안견화풍과 절파화풍이 결합된 경향의 산수화를 남겼다.

조선 중기의 가장 개성적인 화가를 들자면 김명국(金明國)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그림은 광태사학적 호방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달마도(達磨圖)》에서 볼 수 있듯이 선화(禪畵)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이 시대에 김제(金禔)와 김식(金埴)은 소그림을 잘 그렸으며, 김제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절파화풍의 정착에 영향을 미친 이경윤(李慶胤)은 산수인물화에, 그리고 조속(趙涑)과 조지운(趙之耘) 부자는 수묵화조에 뛰어났다.

조선회화는 명 ·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민족적인 색채를 띠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발전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특히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삼절(三絶)로서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삼재(三齋)로 불려진다.

영정조 시대에 민족 자아의식의 발현을 토대로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키던 실학의 발흥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비롯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등의 풍속화도 영향을 미쳤으나, 조선 후기 회화는 절파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중국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어 김두량(金斗樑) ·박제가(朴齊家) 등의 18세기 화가들에 의해 수용된 서양화법은, 그 후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거리 그림에도 반영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진경화법이 쇠퇴하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풍이 세력을 굳힌다. 김정희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조희룡(趙熙龍) ·허련(許鍊) ·전기(田琦) 등의 이른바 추사파와 남종화풍을 토대로 서구적 화풍을 수용한 윤제홍(尹濟弘) ·김수철(金秀哲) 등의 작품이 주목되지만, 19세기 후반의 정치적 격동과 함께 회화 역시 위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 중 장승업(張承業)은 전통회화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은 조선 후기로부터 근대 회화로 연결되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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