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

강희안

[ 姜希顔 ]

요약 조선 초기의 문신. 《용비어천가》를 주석하였고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그림·글씨에 뛰어나 안견·최경과 함께 3절이라 불렸다.
강희안묘

강희안묘

출생-사망 1417 ~ 1464
본관 진주
경우
인재
활동분야 정치
주요수상 원종공신 2등
주요저서 《양화소록》
주요작품 《고사관수도》 《산수인물도》 《강호한거도》 등

본관 진주(晋州), 자 경우(景遇), 호 인재(仁齋). 희맹(希孟)의 형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 돈령부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443년 정인지 등과 세종이 지은 정운(正韻) 28자에 대한 해석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1444년에는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신숙주·최항·박팽년 등과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였으며,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를 주석하였다. 한편 조정의 추천을 받아 명(明)나라가 보낸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8글자를 직접 옥새에 새기기도 하였다.

1447년 이조정랑이 되어 최항·성삼문·이개 등 집현전 학자들과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4년(단종 2) 집현전직제학이 되어 수양대군·양성지·정척(鄭陟) 등과 조선 8도 및 서울 지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으나, 1456년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 1462년 인순부윤이 되었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여 말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하여 출세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의정부에서 일찍부터 검상(檢詳)에 추천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그림·글씨에 뛰어나 세종 때의 안견·최경 등과 더불어 3절(三絶)이라 불렸다. 문집에 원예에 관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으며, 그림으로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전하는데, 산수화·인물화 등 모든 부문에 뛰어났다.

글씨로는 아버지의 묘표인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 등이 남아 있는데, 왕희지와 조맹부의 작품에 비견되기도 한다. 또한 세조 때 임신자(壬申字)를 녹여 활자를 새로 주조할 때도 자본(字本)을 썼는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