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의 한국미술

남북국시대의 한국미술

석굴암 석불

석굴암 석불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서면 고총의 조명이 없어지기 때문에 고분 출토의 유품은 거의 없고 유품은 불교미술뿐이다. 불교는 더욱 더 융성해져 거대한 사찰이 건조되는데, 가람 배치는 삼국시대의 3금당 1탑(三金堂一塔) 또는 1금당 1탑식에서 1금당 쌍탑식으로 바뀌고, 석탑은 8세기 중간의 불국사(佛國寺)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아래위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 형식으로 귀결된다.

9세기로 접어들면 석탑의 기단에 불상 등을 부조(浮彫)하여 장식적으로 되며, 또한 점차로 각부의 비례가 허물어져 쇠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조각은 처음에 초당양식(初唐樣式)을 받아들여 삼국시대 말의 온화함이 상실된 것처럼 보이나, 8세기에 들어서 성당양식(盛唐樣式)을 반영하여 새로운 신체의 양괴(量塊)와 동적(動的)인 아름다움을 지니기 시작하였고, 8세기 중엽의 경주석굴암(慶州石窟庵)의 조각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석굴암은 화강암재(花崗岩材)를 쌓아올려서 만든 원형석굴(圓形石窟)로, 중앙에는 석가 좌상이 있고 주위의 벽면에는 나한(羅漢) ·보살(菩薩) 등의 부조상(浮彫像)이 배치되어 종교적인 엄숙함과 인간적인 온화함이 잘 조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석불도 8세기 말이 되자 중국과 마찬가지로 급속히 쇠퇴하였다.

9세기로 접어들어 불교 자체의 타락과 예술성의 쇠퇴로 말미암아 석불은 목이 없는 기형적인 것이 되어버렸고, 금동불은 천편일률적인 소상(小像)이나 험상궂은 모습을 가진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구리의 부족으로 철불(鐵佛)은 종래의 아미타(阿彌陀)와 석가 대신 약사(藥師)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 공예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범종(梵鐘)이다.

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771년에 주조된 봉덕사(奉德寺) 동종(銅鐘)은 포탄형(砲彈形)의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고, 4구(軀)의 윤곽과 2체(體)의 부조(浮彫)된 비천상(飛天像)으로 장식되었으며, 정부(頂部)에는 중공(中空)의 통형(筒形)과 용형(龍形)의 유(鈕)가 달려 중국의 종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석탑에 격납(格納)하는 사리감(舍利龕)도 우수한 것이 있어, 682년에 건립한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감은 그 대표로서, 외함(外函)에는 정교한 부조사천왕(浮彫四天王)을 붙였으며, 주체는 복잡한 천개(天蓋)를 지닌 방단상(方壇狀)의 불단이다.

토기는 여러 꽃무늬를 스탬프로 찍은 골호(骨壺)가 대부분이며, 고신라 시대의 고배와 감(坩)은 자취를 감추고 당기(唐器)를 모방한 병과 유개발(有蓋鉢), 그리고 경주(慶州)에서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인 귀와(鬼瓦), 복잡한 연화(蓮花) ·동물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한 엄청난 양의 와전류(瓦塼類)도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