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국 시대의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

요약 이집트의 신왕국시대는 제18~제20왕조(BC 1570?∼BC 1070?)를 말한다. 이 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고왕국 ·중왕국에 이어지는 세 번째의 융성기로, 영토도 아시아까지 확대되어 제국시대라고도 불렸다.

 이집트의 신왕국시대는 제18~20왕조(BC 1570?∼BC 1070?) 시기를 말한다. 18왕조를 세운 아흐모스 1세(AhmosⅠ: BC1550~1525 재위) 는 제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스(Kamoses)의 형제로서, 힉소스(Hyksos)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로써 이집트는 힉소스 등 외래 민족에 의해 제 15~17왕조가 들어섰던 제 2중간기를 극복하고 세 번째 융성기인 신왕국 시대를 맞게 되었다.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 본문 이미지 1

제18왕조 초기의 파라오들은 힉소스를 추방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 영토를 확장했다. 남쪽으로는 누비아 지방을 장악했으며, 동쪽으로는 히타이트족을 물리치고 오늘날의 시리아 지역까지 통치했다. 영토를 장악한 후에도 계속하여 팔레스티나 방면으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은 곧이어 전리품을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변하였다. 당시의 서아시아 정세는 각 민족이 분립 ·항쟁하는 시대였다. 곧 이집트도 그와 같은 국제정세 속으로 말려들어갔다.

한편 투트모세 1세(ThutmesⅠ: BC 1504?~1493? 재위)는 제3폭포까지 파병하는 등 남방(南方) 경영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트솁수트(Hatshepsut : BC1479~1458/7 재위) 여왕은 내정에 힘쓰고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푼트 지방에 배를 보내어 향료(香料) ·상아(象牙) ·목재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테베 서쪽 교외의 델 엘 부하리에 거대한 장제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여왕과 공동통치를 하였던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 BC 1479~1425 재위)는 여왕의 사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카데시의 왕이 지휘하는 동맹군과 메깃도에서 싸웠는데 그 승리가 이집트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파라오의 출병은 20년간 전후 17회에 이르렀고 북은 유프라테스강(江) 연안에서 남은 제4폭포까지 지배하에 두게 되어 이집트의 영토는 사상 최대가 되었다. 방대한 전리품과 많은 노예를 얻게 되었고 각지에서 물자가 집결되었으며, 미탄니 ·아시리아 ·크레타 등이 조공하였다. 따라서 테베에는 웅장한 신전 ·왕궁, 귀족의 저택 ·상점 등이 들어서 번화하였다.

귀족은 충실한 가신(家臣)으로서 왕을 받들었으며, 그들을 고급관리로 하는 관료조직이 정비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이제까지 한 사람이었던 재상을 두 사람으로 하여 상 ·하 이집트의 내정에 전념시켰다. 원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강력한 상비군(常備軍)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직업군인이 출현하였고 곧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용병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큰 문제로 되어, 이것은 국력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승리는 신의 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신 자신의 승리이며, 국가의 번영은 아몬신의 번영이라고 생각하였다. 국왕이나 귀족은 신에게 토지를 기증하고 신전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따라서 신관단(神官團)은 관료 ·군인에 못지 않은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방대한 신전령(神殿領)은 신관의 사복을 채웠고 곧이어 왕위계승에도 간섭하였다.

투트모세 3세의 사후 시리아에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II : BC1427~1401/1397 재위)는 미탄니(Mitanni kingdom :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오늘날의 시리아 북동부 지방에 있었던 후리안계 왕국)를 토벌하였고 다음의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 BC 1401/1397~1391 재위)는 미탄니와 동맹하여 그 왕녀를 왕비로 맞았다. 이 무렵부터 아시아에서는 히타이트의 세력이 신장하였는데, 이집트도 그 동향에 무관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투트모스 4세의 뒤를 이은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III : BC 1391~1353 재위)의 시대는 표면상으로 이집트가 가장 안정되고 융성한 시대였으므로 파라오는 외정(外征)보다는 신전 등의 건축공사에 부(富)와 권력을 쏟았다. 이 시기에 건축된 룩소르(Luxor)의 카르낙(Karnak)신전, 멤논(Memnon)의 거상 등을 비롯한 수 많은 유적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파라오는 아시아제국과 서한 및 기증물을 교환하여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여기에 일종의 국제주의시대가 도래하였다(아마르나시대).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IV : BC 1353~1336 재위)는 절대 세력을 갖게 된 테베의 아몬신관단에게 반발하여, 태양신 아톤을 시신(市神)으로 하는 신도(新都)를 오늘날의 텔 엘 아마르나의 땅에 조영하여 아케타톤(Akhenaten: 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명명(命名)하고 스스로도 아케나톤이라고 개명하였다. 왕은 아톤찬가(讚歌)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아시아에서는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정정(政情)이 불안하게 되었다. 결국 파라오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아 사후에 아몬신앙은 부활되었으며 신도(新都)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고정화된 종래의 전통이 타파되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외국과의 문화교류도 행하여져서, 사실적이고 밝은 성격의 아마르나(el-Amarna) 예술을 낳았다. 이것은 투탕카멘(Tutankhamun : BC1333~1324 재위) 왕묘의 출토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오른 투탕카멘은 집권 내내 선왕과 섭정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군인출신의 호렘헤브(Horemheb)가 정권을 장악하며 제18왕조는 끝났다.

제19왕조의 초대는 호렘헤브가 선택한 군인 출신의 람세스 1세(Ramesses I : BC1292~1290? 재위)이고, 그의 아들 세티 1세(Seti I: BD 1290?~1279 재위)는 재차 아시아에서의 이집트의 우위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의 아들 람세스 2세(Ramesses II : BC 1279~1213 재위)는 전형적인 파라오로 67년 동안의 오랜 치세에, 각지에 다수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북쪽 또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아시아 경영 때문에 신도를 삼각주지대의 타니스에 건설하였다. 건축 사업 중에는 테베의 서쪽 교외에 세운 장제전 라메세움이나,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대소 2신전이 대표적이다. 또한 재위 21년째 되던 BC1258년에 남하하는 히타이트를 카데시전투에서 막아냈고, 곧이어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하투실리시 3세와의 사이에 우호조약을 맺었다.

다음의 메르엔프타흐(Merneptah : BC 1213~1203 재위) 파라오 시대부터 아시아는 또다시 민족이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고, 제 19왕조의 세력도 점차 쇠퇴되었다. 메르헨프타흐 이후 4명의 파라오가 뒤를 이었으나, 파라오 트워스레트(Twosret : BC1191~1190) 여왕때에 이르러 제 19왕조가 끝나에 되었다. 트워스레트 여왕은 짧은 재위 기간 중 이집트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했으며, 테베와 헬리오폴리스에서 그 세력을 확고히 다졌다. 그러나 트워스레트는 형부 세트나케트(Setnakhte :BC1190~1186 재위)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며, 세트나케트에 의해 제 20왕조가 시작되었다.

세트나케트의 뒤를 이은 람세스 3세(Ramesses III : BC1186~1155 재위)때 이미 히타이트는 멸망하여 없어졌고 이 무렵부터 삼각주지대는 자주 리비아인 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제 20왕조는 그 이후 약 100년간 지속되며, 람세스 11세(Ramesses XI : BC 1107~1077 재위)까지 이어졌다. 람세스 11세의 오랜 재위 기간동안 왕실의 세력은 쇠퇴해 실질적인 권위는 신관을 비롯한 사제 집단에게 있었으며,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의 반복과 여러 지방 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이집트는 점진적으로 분열되었다. 람세스 11세의 파라오위는 신관(神官) 헤리호르(Herihor : BC 1080~1074 재위)에게 찬탈되었으며, 제 20왕조가 끝나고 이집트는 제 3 중간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신왕국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테베에 조영된 카르나크 ·룩소르 등의 많은 신전과 여러 왕의 장제전, 그리고 테베 서쪽 교외의 벼랑을 뚫고 매장한 국왕과 귀족 ·고관의 연도분(羨道墳)이다. 이것은 모두 엄청난 부와 권력, 그리고 풍부한 노예노동력에 의한 것이지만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과 벽면의 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예술상의 재능은 오늘날에도 그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문학은 구어체(口語體)를 사용하여 민중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농민의 생활을 묘사한 《두 형제 이야기》, 교훈적인 작품 《정의와 허위의 이야기》 등이 있고 이외에도 고관의 분묘에 남은 자전적(自傳的)인 묘비명(墓碑銘) ·전승가, 아몬신 ·아톤신의 찬가, 격언(格言) ·연가(戀歌)도 남아 있다. 또 《사자(死者)의 서》를 비롯한 종교적인 작품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