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올림픽경기대회의 부활배경

근대올림픽경기대회의 부활배경

아테네 올림픽 경기장

아테네 올림픽 경기장

393년 막을 내린 올림픽을 부활시키려는 운동은 피에르 쿠베르탱(Pierre Cubertin) 이전에 이미 유럽 각지에서 있었다. 이는 중세 말기부터 일어난 고대 이집트와 로마그리스의 문명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향수와 같은 것이 유럽 사회를 휩쓸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에서 이룩된 인문주의운동의 전개는 고대 그리스를 재현하려는 운동으로 나타났고, 이런 사상적 배경은 급기야 올림피아 유적지 발굴로 이어졌다.

근대 그리스는 1829년 튀르키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같은해 프랑스고고학 조사반을 그리스에 파견하여 유적의 일부를 발견하였으며, 그리스는 나름대로 선조의 올림피아제를 되살려서 1859년에 대회를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근대올림픽의 태동기에는 민족주의 움직임과 더불어 산업화와 국제화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산업사회가 발전함에 따라서 1851년 런던에서는 처음으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이 박람회는 근대올림픽 초기에 올림픽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근대 올림픽운동이 본격적으로 싹튼 것은 그후 독일의 에른스트 쿠르티우스(Ernst Curtius)가 1881년 올림피아(Olympia) 유적지를 발굴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고대 올림피아의 제전이야말로 그리스 문화의 근원이었다”는 새로운 견해를 발표하였으며, 올림픽의 위인 쿠베르탱을 탄생시켰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유럽의 곳곳에서는 이미 올림픽이라는 이름의 경기가 행해지고 있었다.

쿠베르탱은 군인이 되고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나약해진 프랑스 청년의 심신을 강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에 유학하여 ‘워털루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것은 이튼 교정에서 꽃핀 스포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스포츠가 청소년의 교육으로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뒤 그는 스포츠야말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세계 청년들의 희망이라고 믿고 1889년 ‘프랑스 스포츠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와 더불어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의 청년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우정을 나누게 한다면 이는 곧 세계평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 올림픽 부활을 제창해 오다가 드디어 1894년 6월 16∼23일까지 열린 국제스포츠회의에서 쿠베르탱의 올림픽 제의는 유럽 각국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었고,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국제올림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쿠베르탱의 건의에 따라 그리스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Dimitrios Bikelas)가 초대 IOC 위원장이 되었고 쿠베르탱은 사무총장에 머물렀다. 이들은 제1회 대회를 1896년 유서깊은 아테네(Athenae)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