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아르카이크시대

그리스의 아르카이크시대

아르카이크라는 말은 ‘고풍(古風)’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흔히 폴리스가 성립된 BC 750년 전후부터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동 ·서 양 세력이 충돌한 BC 500년까지를 가리키며, BC 5∼BC 4세기의 고전 시대(古典時代)보다 더 옛시대를 지칭하기 위한 편의상의 명칭이다.

이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그리스인이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서 벌인 활발한 식민시(植民市) 건설 활동이었다. 식민시란 모두 독립적인 폴리스로서 로마나 근대의 식민지처럼 본국 경제의 번영만을 위해 존재하는 착취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식민시 건설은 폴리스 세계의 확대를 의미하였으며, 그들 사이의 해상교역을 발전시킴으로써 마침내는 폴리스 시민의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정치생활에도 중대한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아르카이크 시대의 후반은 귀족정치하의 폴리스를 크게 동요시킨 시대였다.

그리스인의 식민시 건설은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부족과, 귀족정치하에서 귀족의 대토지소유 경향으로 평민에게 돌아갈 여분의 땅이 없어짐으로써 추진된 것이다. 그들의 식민시 개척기간이 귀족 지배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민주정치가 성립되기 직전인 BC 750∼BC 500년경까지 약 2세기 반 동안이었다는 점은 이와 같은 사실들을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BC 800년경의 그리스의 농민 서사시인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농민 중에는 배를 가지고 교역에 종사하는 자도 있어 상업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였다. 식민은 모두 해로(海路)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식민시는 모두 해안에 건설되었다. 따라서 그 영역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와 에게해의 여러 섬에서 시작하여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의 마그나 그라이키아(오늘날의 타란토, 크로토네 등 항구 도시의 총칭)를 거쳐 마실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 및 에스파냐의 여러 도시에 이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각 지방의 특산물 유통이 크게 진전되고 공업원료인 구리 ·주석 ·철 등이 풍부하게 공급됨으로써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무구(武具)를 싸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사회변혁을 가능하게 했던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즉 청동무구(靑銅武具)로 중무장한 중장보병시민(重裝步兵市民)이 중소 자유농민 중에서 나오게 되어 그들이 밀집대(密集隊)를 구성하고 싸우는 새 전술이 유행됨으로써 평민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말을 타고 싸우던 귀족층 기사의 국방상 역할이 저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전사(戰士)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폴리스의 이와 같은 군사상의 중대 변화는 폴리스 안의 정치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더욱이 7세기 후반부터는 리디아의 화폐가 전해져 평민 중에서도 금력을 토대로 한 새로운 부유층이 형성되고 그 부가 토지소유 귀족의 부를 능가하는 상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권도 종래와 같이 귀족의 독점물만은 아니었고, 신흥세력으로 변한 평민도 귀족과 대등한 발언권을 요구함으로써 상호 대립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서 두 계층의 사회적 대립의 완화를 목적으로 한 타협적 개혁안이 절실히 요청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솔론의 개혁안이었다.

화폐경제의 유통과 더불어 빚을 지고 갚지 못하여 노예로 팔리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이것이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으므로, BC 594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솔론은 종래의 부채대장(負債臺帳)의 말소, 인신(人身)을 저당하는 대금(貸金)의 금지 및 토지소유의 상환설정 등의 경제문제에 착수함으로써 시민 공동체의 보존에 힘썼다. 또 해마다 농산물 수입의 크고 작음에 따라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4등급으로 정하여 양(兩) 계층의 대립 완화를 시도하였다(金權政治:Timocracy).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양 계층의 이해를 미온적으로 절충한 것으로, 그의 중도적인 개혁에는 두 계급이 다같이 불만이었다.

BC 561년 명문출신인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른바 참주정치(僭主政治:Tyrany)를 등장케 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의 일이었다. 참주정치란 크게 보아 솔론의 금권정치와 더불어 민주정치에 이르는 불가결한 하나의 과도적 정치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귀족의 타도가 선행되어야 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평민이라는 신흥세력을 자기의 정치기반으로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비록 도시정치의 전통을 유린했다고는 하지만 귀족 타도와 평민의 지위향상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것이 그의 아들 히피아스에 이르러 폭정으로 변하자 BC 510년 그는 추방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광범한 민주정치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본래 솔론계 평민파였던 클레이스테네스는 BC 508년 집권한 후 먼저 귀족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종래의 혈연 중심적인 부족구획을 지역적인 10부족구(部族區)로 개편하고, 각 구에서 50명의 대표를 추첨하게 하여 500인 평의회(評議會)를 구성함으로써 이를 전시민이 출석하는 민회(民會)에 대해 상설 정무기관(常設政務機關)으로 삼았다. 그리고 명문의 정치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참주의 발생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법(陶片追放法:Ostrakismos)을 만들어 중장보병시민을 중심으로 한 민주정치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한편 이 시대에 아테네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하고 강대한 폴리스였던 스파르타에서도 비록 참주는 나오지 않았지만 중대한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장보병 밀집대의 전술이 스파르타에서는 일찍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BC 8세기 말에 스파르타인은 서쪽의 메세니아 지방을 정복하고 그 주민을 국유노예로 삼았지만, BC 6세기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 그 진압에 극심한 고전을 겪었다. 스파르타의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쇄국주의, 그리고 철저한 근검절약에 입각한 스파르타식 생활양식이 나온 것은 바로 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스파르타 시민은 반자유민이나 국유노예에 대한 수적 열세를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한 질적 우세로써 극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분할지의 소유자였으며 ‘평등자(平等者)’라 불렸다. 두 사람의 왕이 있었지만 이들은 군의 지휘관에 불과했고, BC 6세기 중반경부터 정치의 실권은 매년 시민 중에서 선출된 임기 1년의 최고행정관이 장악하였다. 따라서 스파르타는 다른 폴리스에 앞서 중장보병시민단의 고대 민주정치가 철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로서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가 된 것도 모두 그 군사력을 토대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