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독립운동

그리스의 독립운동

18세기에 이르러 투르크는 유럽세력의 대두와 더불어 자국 세력의 약세가 노출되자, 그 반동으로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에 대한 압제를 새로이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을 서로 바꾸어 지배시킴으로써 상호대립을 촉진시키는 간교한 통치기술도 구사하여, 그들은 루마니아 지방(몰다비아 ·와라키아)을 파나리오에게 맡겨서 지배시키는 한편, 그리스의 질서유지는 반대로 알바니아인에게 위임하였다. 아르마톨이 클레프트와 합세하여 투르크 지배에 항거한 것은 바로 이 직후에 있었던 일이다.

더욱이 1770년에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반란의 불길이 타올랐고, 이것은 다시 러시아의 사주를 받아 더한층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 반란은 러시아의 방임과 지도자 및 지도이념의 결여로 실패로 끝나 결국 그리스에서 수만 명이 학살되고, 투르크 제국의 앞잡이였던 알바니아 군대의 약탈과 폭행을 한껏 당하는 비참한 운명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태와는 달리 그리스의 민족운동은 계속 각처의 민족진영으로부터 성원을 받아 오히려 크게 고조되어 갔다.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중립을 지킨 투르크의 보호하에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자기지위를 크게 향상시킨 그리스 상인이 이때부터 반(反)투르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한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게 된 파리 ·런던 ·오데사 ·마르세유 등 각처의 그리스 상인들은 앞을 다투어 본국의 학교 건립에 자금을 제공하여 교육열을 진작시켰고, 독립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1814년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결성된 ‘헤타이리아 필리케’도 그리스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그리스 상인의 애국적 비밀결사였다. 이 결사를 중심으로 A.입실란티스를 받들고 21년 독립전쟁의 봉화를 올렸다. 그 후 30년 런던조약으로 독립이 인정되고, 32년 바이에른왕 루드비히 1세의 왕자 오토 1세가 17세로 그리스의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