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정치

러시아의 정치

러시아 의사당

러시아 의사당


구소련 시절의 러시아의 정치는 공산당 1당 독재체재의 역사에 의해 설명된다. 구소련의 해체로 등장한 러시아는 대내외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법적 계승자이지만, 러시아의 정치제도는 구소련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구소련이 공산당 1당 독재국가였던 데 비해 러시아는 다당제 민주국가이다. 러시아의 정치체제의 형성과정은 구소련의 붕괴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구소련시절 1990년 2월의 당중앙위에서 공산당의 1당독재를 포기하고 당의 권한을 축소하면서 복수정당제가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1990년 3월의 헌법개정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통괄하는 최고직으로 대통령직이 신설되면서 구소련은 공산당은 유지하되 당과 국가가 분리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가 독자적인 공산당을 만들기시작하였으며, 구소련연방을 묶어주던 각 공화국들도 각자의 당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구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이었던 옐친은 복수정당제로의 이행, 당명 변경 등 획기적인 개혁정책들을 주장하면서 공산당에서 탈당하였다. 옐친은 급진개혁론자였는데, 급진개혁론자의 후원을 받으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고르바쵸프의 정책노선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구소련의 공산당은 프롤레타라리아 국제주의에 토대를 둔 하나의 공산당체제를 버리고 각 공화국의 형식적인 공산당의 명칭을 지닌 민족정당의 연합체로 해체됨으로써 구소련연방의 공산당은 해체되었다. 
 
옐친은 1991년 6월에는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대통령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고 소련연방을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파에 의한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를 비롯한 12개의 공화국은 매우 느슨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를 형성하였는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이 연합에서 빠졌다. 러시아공화국을 포함한 15개 소비에트공화국들은 ‘사회주의’ 혹은 ‘소비에트’ 형용사를 삭제했으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시도하였다.

러시아의 대통령이 된 엘친은 민주정치와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옐친의 개혁은 시행착오와 방법에 대한 견해차로 정치 세력간의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치체계는 구소련의 헌법에 기반을 둔 낡은 정치구조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당면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구소련 시절 구성되어 공산주의적인 이념을 선호하는 보수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는 옐친 행정부의 개혁정책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지지부진한 개혁과 계속되는 경제난, 구소련 공화국과의 관계, 러시아 연방의 영토적 통합성 문제들이 러시아의 정치를 불안정하게 하였다. 70여 년간 공산체제하에서 민주정치의 경험이 결여된 러시아는 새로운 민주정치체제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정치불안에 당면한 것이다.
 
옐친은 개혁을 위해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세력을 비롯한 보수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991년 6월에는 러시아공화국내 정부기관에서의 공산당의 활동을 정지시켰고 보수세력의 쿠데타를 진압한 후에는 공산당을 불법화하였다. 구공산당세력은 구소련연방 공산당을 중심으로 옐친을 압박하였다. 1992년 개혁적인 가이다르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가격자유화 등 경제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오히려 심각해진 경제문제로 구공산당과 민족주의자의 비판을 받았다. 치안, 민생문제, 부정부패로 총체적 난국이 되었으며,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은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파와 '시민연맹'을 중심으로 부통령이 주도하는 중도파가 옐친의 개혁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옐친은 개혁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승리함으로써  개혁에 반대하는 최고회의를 1993년 9월에 해산하고 10월에는 국회의사당에서 무력저항을 하는 보수세력에 대한 무력진압을 통해 최고회의를 해체한 후, 새로운 의회(두마)의 의원 선거와 새로운 헌법에 대한 투표를 실시하였다. 12월의 선거에서 신헌법안은 유권자중 54.8%가 투표에 참가하여 58.4%의 찬성으로 통과 되어 1978년에 제정된 구소련의 헌법은 폐지되고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구조가 성립하게 되었다.
 
옐친은 보수파를 제압했으나 많은 의석을 확보하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신헌법은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집중시킨 강력한 대통령제의 권력구조를 담고 있었다. 신헌법하에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모색되었는데, 가이다르는 옐친을 지지할 정당인  '러시아의 선택'을 결성하였고, 개혁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는 '러시아 공화당'과 '기독교 민주당' 등의 정당들도 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일부의 세력들은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막대를 부를 축척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장경제로의 이행과정에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책결정과정에 개입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정치세력인 올리가르히라고 불리우는 과두지배세력이 등장하여 정치엘리트, 안보엘리트와 함께 주요 정치세력이 되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이후 옐친의 재선에 기여함으로써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었다. 
 
옐친은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로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총리를 스테파신에서 푸틴으로 교체한다. 이러한 총리의 경질은 가장 강력한 총선 및 대선 후보인 모스크바 시장 루쉬코프가 창당한 '조국당'과 주요 지방 지도자들로 구성된 '全러시아당'이 연합하여 '조국-全러시아당'을 결성함으로써 옐친 대통령을 압박을 가하였고, 1999년 12월 19일의 총선과 2000년 대선에서의 정권 재창출을 통한 옐친 대통령 및 측근 인사들의 안전 및 권력유지를 도모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옐친은 선거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사임함으로서 푸틴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긴다. 47세의 푸틴 대통령 권한대행은 체첸사태를 강경진압함으로써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강력한 경쟁자인 프리마코프, 레베디, 키리옌코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2000년 5월에 대통령에 취임한 푸틴은 '강력한 러시아 국가' 건설을 정책 목표로 내걸고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면서 의회·지방·경제계에 입장을 강화하는 형태로 국내를 장악하였다. 더욱이 국제유가가 인상되면서 러시아 경제가 활력을 더하면서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으며, 2004년 3월 14일 그의 지지세력인 '단합러시아'와 친푸틴계의 의회의원을 등에 업고 투표자 71.3%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공산당의 하리토모프를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2008년 5월 7일 제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는 푸틴이 재선에 성공한 뒤 러시아 제1부총리를 지냈으며, 푸틴의 후계자로 지목받으며 통합러시아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2008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70%가 넘는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2년 3월 4일 치러진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은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 대통령이었던 메드베데프가 총리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