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교회

비잔티움 교회

[ Byzantium Church ]

요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재위 527~565)가 사망한 565년 이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동로마 제국 내의 비잔티움 전례를 따르던 동방정교회.
원어명 Ecclesia Byzantina

후대의 역사가들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 이후부터 동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비잔티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비잔티움 교회의 역사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와 일치한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권력을 받았고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을 숭배하도록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제국 황제들은 교회의 정책과 교리의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한편, 공의회와 교회의 결정 사항을 제국의 법으로 집행하였다. 심지어 어떤 황제는 자신을 왕이자 사제로 여겨 비잔티움 교회의 수장으로 자부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와 교회를 일체로 본 동로마 제국의 방침에 따라 비잔티움 교회는 부분적으로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시종일관 국가에 종속된 국가 교회적인 면모를 보였다. 비잔틴 교회의 획기적 업적은 슬라브 민족에 대한 선교였다. 9세기경부터 제국 주변에 있던 중부 유럽의 불가리아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한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 모라비아에 파견된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주교이다. 이들은 스스로 창안한 치릴로식 문자를 사용하여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발달한 법률과 문화를 함께 전해 주었다. 이들의 성공으로 864년에 불가리아, 988년도에는 키이우 공국이 개종하였으며, 1220년에는 세르비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비잔티움 교회의 신학은 영적인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비적이고 그리스적이다. 인간에 대한 신 중심적 시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의 개념, 특히 신화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비조직적이면서도 체험적· 신비적· 부정적인 방법론을 사용한 이들의 '부정 신학은 신학뿐 아니라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수도원에서 발전되었고, 동방 교회 전체의 신학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레고리오 팔라마스는 영성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헤시카즘이란 신비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리스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에서 중요한 영성적 전통으로 인정받고 있는 헤시카즘은 수도윈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통하여 수도원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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