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배론

[ 舟論 ]

요약 충북 제천에 있는 천주교 사적지.
배론성지 성당

배론성지 성당

천주교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1801년에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이 〈백서(帛書)〉를 작성하였고, 1855년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된 곳이다. 옛 지명은 팔송정 도점촌(陶店村)이다. 배론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이들은 주로 옹기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인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은 김한빈(金漢彬, 베드로)과 함께 그해 2월말에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이때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신자 김귀동(金貴同)이 이들에게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은신처로 마련해 주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실과 김한빈, 황심(黃沁, 토마스) 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백서의 전달자가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체포되어 그의 자백으로 황심이 체포되고 이어 황사영, 김한빈, 집주인 김귀동 등도 체포되었다. 이와 관련된 신자가 모두 체포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그후 1840년대 수원 출신의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박해를 피해 다니다가 1843년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1855년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J.A.메스트르 신부가 이곳에 ‘성 요셉 신학교’을 설립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안에서 최초로 격식을 갖춘 신학교로 3명의 첫 입학생들이 장주기에게 한문을 배웠고, 이듬해 푸르티에(Pourthie)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864년 말 처음으로 서품식을 갖고 2명에게 삭발례와 소품을 주었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사목 방문 도중에 가끔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였으나 1861년 과로와 장티푸스로 문경의 한 교우촌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초 푸르티에 신부의 주관 아래 배론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장주기를 체포한데 이어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이들이 모두 순교하자 배론 신학교도 폐쇄되었다. 이들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자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박해가 끝나면서 재건되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1942년 12월에 공소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그 묘비를 만들어 해방 후에 제막식을 가졌다. 1976년 7월 원주교구에서는 ‘배론 성지 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성지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카테고리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