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 黃嗣永 ]
- 요약
조선 후기의 천주교도. 신유박해 때 제천 배론 산중으로 피신하여 토굴 속에서 '백서'를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베이징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밀서가 발각되어 황사영은 사형에 처해지고 천주교 박해도 한층 가혹해졌다.
황사영순교자헌양탑
출생-사망 | 1775 ~ 180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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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창원(昌原) |
자 | 덕소(德召) |
별칭 | 세례명 알렉산데르 |
활동분야 | 종교 |
세례명 알렉산데르. 본관 창원(昌原). 자 덕소(德召). 남인(南人)으로 정5품 정랑(正郞)을 지낸 석범(錫範)의 아들. 1790년(정조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가 되고 처가의 인도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1794년 한국에 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지도하는 명도회(明道會)에 가입, 교리를 공부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제천(堤川) 배론(排論:舟論)의 산중에 피신, 토굴 속에서 주문모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의 교세 및 박해의 상황, 천주교를 널리 펼칠 방책 등을 명주천에 적어서 동지 황심(黃沁) ·옥천희(玉千禧)에게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가 베이징[北京]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主敎)에게 전달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심 등과 함께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3인이 모두 사형당하였다. 이 밀서를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라 하는데, 이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한층 가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