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련

허백련

[ 許百鍊 ]

요약 한국의 동양화가.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석입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지내며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고, 오랜 기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의재허백련화백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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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891.11.2 ~ 1977.2.15
의재(毅齋)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전남 진도(珍島)
주요수상 예술원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주요작품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1891년(고종 28년) 11월 2일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부친은 허동언(許東彦)이고 모친은 박동예이다. 소치 허련(小痴 許鍊)은 그의 20촌 할아버지가 되며 미산 허형(米山 許瀅)은 21촌 할아버지이다. 8살 때 진도에 유배중이던 무정 정만조(茂停 鄭萬朝)의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11살 때 운림산방에서 미산 허형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집안에서는 장자라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의재(毅齋)라는 호는 그가 15세 때 스승인 정만조가 지어준 것이다. 1905년 진도 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0년 학업을 위해 한양으로 유학을 갔다. 한양에서는 기호학교(현 중앙고)에 다녔다. 
1912년 일본 쿄토[京都]로 유학을 떠났으며 1913년 봄에 도쿄[東京]으로 옮겼다. 도쿄에서 인촌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그해 5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청강생으로 수학하다가 11월에 자퇴하였다. 유학생활중 가난으로 신문배달을 하였고 말더듬으로 교정을 받기도 하였다. 1915년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일본 남종화의 대가였던 고무로 스이운[소실취운(小室翠雲)]을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어 다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인삼장사를 하여 큰 돈을 벌기도 하였다. 1916년 일본 니가타[新潟]에서 개인전을 두번 열었다가 부친이 위독하여 1918년 겨울에 귀국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가기위해 목포에 들렀다가 스승인 미산(米山)을 만났고 목포와 광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인촌 김성수의 도움을 받아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출품하여 2등과 입선을 하였고 그해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 6회까지 계속출품하였고 이후는 출품하지 않았다.
1946년 무등산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설립하여 춘설다(春雪茶)를 생산하였는데 다도(茶道)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해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1948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시·서·화를 겸전한 남종화의 대가로 1973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회고전을 가졌다. 197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7년 2월 15일 8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다.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추경산수(秋景山水)》 (197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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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 춘설헌

허백련 춘설헌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광주 출신의 한국화가 허백련이 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년간 기거하던 집이다.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