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

황진

[ 黃進 ]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 일본의 내침을 예언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인, 진안, 안덕원, 이치 전투, 진주성 등에서 싸웠다.
진주 촉석 정충단비

진주 촉석 정충단비

출생-사망 1550 ~ 1593
본관 장수(長水)
명보(明甫)
아술당(蛾述堂)
시호 무민(武愍)
국적 조선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전라도 남원
주요업적 임진왜란 참전(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
시대 조선시대(명종, 선조)

1550년(명종 5) 전라도 남원 아버지 황윤공(黃允恭)과 어머니 남원 방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5대조는 조선 세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은 황희(黃喜)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 명보(明甫), 호 아술당(蛾述堂), 시호는 1673년(현종 14)에 임진왜란 때 세운 그의 공적으로 하사받은 무민(武愍)이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77년 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3년 여진족이 쳐들어와 일으킨 니탕개란(尼湯介亂)에서 공을 세웠다. 1591년 조선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조만간 일본이 내침(來侵)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동행했던 김성일(金誠一)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본이 침략할 조짐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한양을 점령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3도 근왕병(勤王兵)에 동복(同福)현감으로 참가하여 5만을 이끌고 북상하여 용인(龍仁)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불과 수천명의 왜군에게 패전하고 말았다. 전라도로 철군하여 전열을 정비한 다음 전라도를 진출하기 위해 전주로 쳐들어 오는 왜군을 안덕원(安德院)에서 격퇴하였다.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어 권율장군과 함께 완주(完州)와 금산(錦山)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인 이치(梨峙 : 배재)전투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당시 1만 명의 왜적에 비해 1천 명의 비정규군으로 싸웠으며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거둔 대승이었다. 그 공으로 익산(益山)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助防將)에 오르고, 권율을 따라 한성으로 북상하여 수원 독산성(禿山城)에 주둔하였다가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水原)에서 싸웠다.

왜군에 포위되었다가 위기를 모면하고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경기 죽산(竹山)에서 왜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다. 패퇴하는 적을 추격, 상주(尙州)에 이르는 동안 연승(連勝)을 거두었다. 왜군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2차로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려고 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싸웠다. 황진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을 막아내다 머리에 조총을 맞아 전사하였다. 우찬성에 추증되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