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필랴 문화

트리필랴 문화

[ Trypillia culture ]

요약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동유럽지역에서 나타난 고대 문화.
원어명 Tripol'skaya kul'tura

동유럽몰도바우크라이나루마니아 등지에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청동기시대까지 폭넓게 나타났던 문화이다. 1897년 체코 출신의 러시아 고고학자인 비켄티 흐보이카(Vikentiy Khvoika, 1850∼1914)가 우크라이나 키이우(Kyiv) 인근의 트리필랴[Trypillia, 러시아어로는 트리폴리예(Tripolyye)]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에 관해 보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1899년 고고학계에서 드네프르강(Dnieper, 드니프로강) 중부 지역의 독립된 신석기 문화로 인정되면서 ‘트리필랴 문화’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884년 루마니아의 쿠쿠테니(Cucuteni)에서도 유사한 특성을 지닌 유적이 발견되어 루마니아에서는 ‘쿠쿠테니 문화(Cucuteni culture)’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이 유적들이 같은 문화의 범위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쿠쿠테니-트리필랴 문화(Cucuteni–Trypillia culture)’라는 명칭이 더 폭넓게 쓰인다.

트리필랴 문화는 카르파티아산맥의 동쪽 산기슭을 따라 드네스트르강(Dniester)과 드네프르강 유역, 흑해 연안 지역에 폭넓게 분포했다. 지금까지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동북부 지역에서 모두 3,000여 곳의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5500년 무렵부터 기원전 2700년 무렵까지 이어졌는데, 동유럽 평원 지역에서 쿠르간(kurgan) 고분을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트리필랴 문화는 흔히 전기(기원전 5500∼4000년대 중반)・중기(기원전 4000년대 중반∼ 3200년)・후기(기원전 3200∼2700년)로 특징이 구분된다. 전기는 카르파티아산맥 동쪽의 평원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지가 형성되어 농업과 목축 생활이 시작된 시기이다. 이 시기 주거지는 대부분 움집의 형태였으나, 점차 지상 주택이 늘어났다. 중기에는 인구가 크게 증가해 정착지가 곳곳으로 확산되었고, 1만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살기도 했다. 후기에는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강 유역으로도 정착지가 확대되었고, 구리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생활은 사냥・어업과 함께 농업과 목축으로 이루어졌고, 밀, 호밀, 완두콩이 경작되었다. 정착지에서 말의 뼈가 발견되기도 했으나, 말의 사육이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원시적인 형태의 쟁기를 사용했으며, 구리・금과 같은 금속의 사용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순동(純銅)의 사용이 아니라, 청동 합금을 자체적으로 제작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후기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유물들은 다른 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정착지를 이루어 살았는데, 특이하게도 유적지에서는 주기적으로 정착지를 모두 불태웠다가 다시 세운 흔적이 자주 발견된다. 이는 종교적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구리로 만든 팔찌・반지・고리나, 여성・동물의 모습을 점토로 빚은 조각상도 출토되었는데, 이것들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믿음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독특한 무늬를 지닌 유색 토기를 사용했는데, 전기에는 부조 장식을 곁들인 회색이나 흰색 토기가 제작되었다. 중기에는 노란색・빨간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나선형 무늬를 표현한 토기가 제작되었고, 형태도 다양해졌다. 후기에는 나선형 무늬가 밧줄 무늬로 바뀌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날 트리필랴 문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반슬라브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들은 트리필랴 문화를 ‘우크라이나의 원형’으로 강조하며, 루스인(Rus)이 9세기에 키이우를 중심으로 동유럽과 북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국가(Kievan Rus)를 세우기 전부터 우크라이나인은 이미 트리필랴 문화에 뿌리를 둔 문화를 지닌 독립된 민족으로 존재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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