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최재형

[ 崔在亨 ]

요약 한말의 독립운동가.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듬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출생-사망 1860.8.15 ~ 1920.4.5
별칭 일명 재형(在衡)·도형(都憲), 러시아명 뻬돌소오·최뻬찌카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함북 경원(慶源)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최흥백으로 소작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그가 9세 때 함경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할아버지와 부모를 따라 연해주 지신허(地新墟)로 이주하였다. 지신허는 핫산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연해주로 건너온 한인들의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최재형의 집안은 극심한 가난으로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당시 하산에 있는 한인학교에도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때문에 최재형은 러시아학교에 다녔고 러시아어와 문화를 익히게 되었다. 11세 때 집에서 가출하여 상선의 선원이 되었고 러시아인 선장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기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최재형은 러시아명 '포트르 세메노비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페테르부르크까지 항해했고 이때 많은 견문을 넓혔다. 1877년 17세가 되던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장사를 통해 돈을 모았으며, 부모가 있는 지신허 인근으로 돌아가 많은 땅을 사들여 농장을 운영했다. 당시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 사이에서 러시아어가 유창한 유일한 인물이었고 7년간의 선원생활로 러시아 뿐만아니라 세계문물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일했으며 이때문에 러시아 군관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러시아에서 고용한 한인노동자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한인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대변하였다. 러시아 군의 서기가 되어 두 차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황제를 알현(謁見)하고 5개의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한인들이 살고있는 얀치혜남도소의 책임 관리직인 도헌(都憲)이 되었다. 그는 한인들의 자녀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졌으며 러시아어와 문물을 공부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리고 고등소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최재형은 도헌으로 연봉 3,000루블을 받게 되자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자로 매년 교포학생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켜 한인 인재양성에도 노력하였다.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군생활품을 납품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외 농장을 운영하며 다양한 사업적 수완으로 성공한 한인사업가로 명망이 높아졌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고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병합되자 최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朴泳孝)를 만나고 위기에 몰린 조국의 현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계동학교를 설립한 이범윤(李範允)과 상의,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이범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8년 4월 얀치혜에서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항일의병 활동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1908년부터 산발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함북 일대의 일본수비대와 소규모 전투를 벌이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해 7월 회령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자금의 부족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따르자 최재형의 의병세력은 위축되었다. 또한 일본의 요청으로 러시아측에서 의병활동을 압박하자 무장활동을 전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맡아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절규하였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 한족민회(韓族民會) 회장에 취임, 교포자녀들을 위한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국권피탈 후에는 사태를 관망하며 동지규합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은 니항사건을 빌미로 연해주 일대에 출병하여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송 도중 탈주를 시도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역참조항목

대동공보, 창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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