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朝鮮建國準備委員會 ]

요약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구분 건국준비단체
설립일 1945년 08월 15일
설립목적 건국준비를 위한 대표기관 역할, 정치세력 형성
주요활동/업무 건국공작 강령 발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집행위원회 개편,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소집
소재지 서울

약칭하여 건준(建準)이라고도 한다.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협상 대상자로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찾았다. 이때 건국준비를 위한 민족의 대표기관과 정치세력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여운형이 그에 동조함으로써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사무실은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두었고 위원장에 여운형(呂運亨), 부위원장에 안재홍(安在鴻)·허헌(許憲), 총무부장에 최근우(崔謹愚), 재무부장에 이규갑(李奎甲), 조직부장에 정백(鄭栢), 선전부장에 조동호(趙東祜), 무경부장에 권태석(權泰錫) 등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설립목적은 민족의 총역량을 일원화하여 자주적으로 과도기의 국내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8월 18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하여 건국공작 5개 항을 제시하였고 9월 2일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①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이라는 3개 항이었다. 건준은 일본 경찰조직을 밀어내고 각 지방의 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지방마다 조직의 이름은 달랐지만 치안대, 보안대 등의 이름으로 145곳에서 조직되었다.

그러나 건준이 지나치게 좌익진보세력으로 조직되자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여 탈퇴하였으며, 부위원장 안재홍도 탈퇴하여 9월 1일 조선국민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정백·고경흠(高景欽) 등의 간부들은 위원회의 승인 없이 경성지부를 결성하였다. 9월 4일 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려 집행위원회 개편을 단행하였고 9월 6일에는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경기여자중학교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통과된 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건준은 9월 7일 해체되고 9월 11일 조각을 단행하였다.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金奎植), 김구(金九), 김성수, 김병로, 안재홍, 이강국, 신익희, 조만식 등 55명의 대표위원과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김창숙(金昌淑), 이시영(李始榮) 등 12명의 고문위원을 선발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총리에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처음부터 건준을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리던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 우익진영은 이들 조직을 벽상조각(壁上組閣)이라고 비난하였다. 그후 해외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귀국하고 이승만이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한편 미군정청에서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하는 포고를 발표하자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연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