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

정인지

[ 鄭麟趾 ]

요약 조선 전기 문신 겸 학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세종~ 문종 대에는 문화 발전에, 단종~성종 대에는 정치 안정에 기여하였다.
괴산 정인지 묘소

괴산 정인지 묘소

출생-사망 1396 ~ 1478
본관 하동(河東)
백저(伯雎)
학역재(學易齋)
시호 문성(文成)
활동분야 정치, 문학
주요저서 《학역재집(學易齋集)》

본관 하동(河東). 자 백저(伯雎). 호 학역재(學易齋). 시호 문성(文成). 1411년(태종 11) 생원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예빈주부(禮賓主簿) ·사헌감찰(司憲監察) ·예조좌랑을 거쳐, 1418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고, 1425년(세종 7) 집현전직제학(直提學)에 승진하였다. 1427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좌필선(左弼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1432년 예문관제학 ·춘추관동지사를 거쳐 이조참판 ·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439년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이듬해 형조판서에 승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였다. 1443년 중추원지사 ·제조를 거쳐, 1445년 우참찬 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하였고, 뒤에 공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452년(문종 2)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좌의정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영의정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58년 공신연(功臣宴)에서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하여 부여(扶餘)에 부처(付處)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고, 1465년 궤장(几杖)을 받았다. 1468년(예종 즉위년)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1470년(성종 1)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천문 ·역법(曆法) ·아악 등에 관한 책을 많이 편찬하였다. 문집에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고, 편저로 《고려사(高麗史)》 《역대역법(歷代曆法)》 《역대병요(歷代兵要)》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