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의병

정미의병

[ 丁未義兵 ]

요약 1907년(융희 1)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확대된 의병전쟁.
정미의병 발원터

정미의병 발원터

1905년(광무 10) 통감부 설치 이후 조선병합을 서두르던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인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군인들은 해산당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서울 ·원주 ·강화 진위대 등지에서 무장봉기를 하는 한편, 무기를 가지고 각지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는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상태에 있던 후기 의병활동을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전환기를 맞게 하였다. 우선 후기의병은 해산군인의 참여로 무기와 병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또 전술의 발전도 가져왔다. 특히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에 어두운 점을 이용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벌인 게릴라전술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무력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로 크게 고양된 후기 의병은 일제가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이기까지 전민족의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후 의병구성에서도 종래의 유생 중심에서 벗어나 농민 ·하급 해산군인 ·천민 ·노동자 등도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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