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

이성구

[ 李聖求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이항복이 정협 문제로 모함을 받자 이들을 물리치고 이항복을 도왔다. 인조반정 후 대사헌,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 세자가 볼모로 선양에 갈 때 좌의정으로 수행했다. 돈령부영사, 영의정에 올랐다.
이성구 묘

이성구 묘

출생-사망 1584 ~ 1643
본관 전주
자이
분사, 정숙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분사집》

본관 전주(全州). 자 자이(子異). 호 분사(汾沙). 시호 정숙(貞肅). 1603년(선조 36) 진사를 거쳐 160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典籍), 예조·병조·형조의 좌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교리(校理)가 되었을 때, 마침 부친 수광(晬光)은 대사헌, 아우 민구(敏求)는 홍문관에 있었으므로 한 집에서 3인이 삼사(三司)를 지내게 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의 문제로 반대파의 모함을 받자 지평(持平)으로서 이들을 물리치고 이항복을 도왔다. 그후 영평(永平)판관으로 포천(抱川)에 이항복의 사우(祠宇)를 세웠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초에 사간에 발탁되고 대사헌을 거쳐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세자가 볼모로 선양[瀋陽]에 가게 되자 좌의정으로 이를 수행하였다.

그후 한때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사은사로서 회은(懷恩)대군과 함께 선양에 가서, 명나라를 치는데 원군(援軍)을 보낼 수 없다는 조정의 방침을 전달하였다. 이듬해 돈령부영사로 사신이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41년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저서에 《분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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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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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구 묘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