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

유리왕

[ 琉璃王 ]

요약 고구려 제2대 왕(재위 BC 19∼AD 18).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성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짓기도 하였으며, 3년 도읍을 홀본(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출생-사망 ? ~ 18
재위기간 BC 19년∼AD 18년
별칭 유리명왕
활동분야 정치

휘(諱) 유리(類利)·유류(儒留)·주류(朱留).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유리가 출생한 때는 명확하지 않지만 서기전 38~37년으로 추정한다. 동명성왕(주몽)의 원자(맏아들)로 부여에서 출생하였다가, 주몽이 대소의 위협을 피해 졸본으로 달아나자 어머니 예씨(禮氏)와 함께 성장하였다. 동부여의 왕이었던 대소의 견제를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자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하였다.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하였고, 그해 4월 아버지 동명성왕을 만나 태자로 책봉되었다. 유류는 태자로 책봉되고 난 후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형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두 세력은 분파되어 비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하였고 유류는 동명성왕이 사망하자 유리명왕으로 등극하였다.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일찍 사망하였고 둘째딸과 재혼하였다. BC 17년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黃鳥歌)》를 지었으며, BC 9년 고구려의 변방세력인 선비족(鮮卑族)를 공략하여 항복받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하지만 동부여(東夫餘)의 위협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서기 3년 도읍을 홀본(忽本:졸본)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유리왕의 맏아들 도절은 동부여와 화친을 반대하였다가 갑자기 급사하여 사망하고 둘째아들 해명은 졸본에 머물렀는데 반란을 도모한다는 의심을 받고 자결하도록 했다. 13년 동부여(扶餘)의 대소가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으며 셋째아들 무휼(대무신왕)의 공이 높았다. 14년 군사 2만으로 양맥(梁貊:小水貊)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高句麗縣:玄菟郡의 屬縣)을 빼앗는 성공을 거두며 영토확장과 더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재위 36년 후 사망하여 두곡동원(豆谷東原)에 묻혔다.

 
유리왕 본문 이미지 1 


재사치희화희도절해색주(민중왕)무휼(대무신왕)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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