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충현

위충현

[ 魏忠賢 ]

요약 중국 명(明) 말기의 환관(宦官)으로 희종(熹宗)의 총애를 받아 비밀경찰인 동창(東廠)의 수장(首長)이 되었고, 동림파(東林派) 관료를 탄압하며 정치를 농단(壟斷)하여 명(明)의 멸망을 촉진하였다.
출생-사망 ? ~ 1627
별칭 이진충
국적 중국 명
출생지 중국 허베이 쑤닝현

본명은 이진충(李進忠)으로 허베이[河北] 쑤닝[肅寧] 출신이다. 시정(市井)에서 무뢰배(無賴輩) 생활을 하다 도박으로 가진 것을 탕진하고 스스로 환관(宦官)이 되었다. 입궁 후에 성과 이름을 위충현(魏忠賢)으로 바꾸었으며, 태자궁(太子宫)의 태감(太監)인 왕안(王安)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신종(神宗, 재위 1572~1620)의 장손(長孫)인 주유교(朱由校)의 유모(乳母) 객씨(客氏)와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주유교(朱由校)에게 접근하여 그의 환심을 샀다.

1620년 신종(神宗)이 죽고 광종(光宗, 재위 1620)이 즉위하였으나 한 달 만에 죽고, 주유교(朱由校, 熹宗, 재위 1620~1627)가 황제가 되었다. 희종(熹宗)이 즉위한 뒤 위충현(魏忠賢)은 환관(宦官)의 수장(首長)인 사례감(司禮監) 병필태감(秉筆太監)이 되었으며, 1623년부터는 황제 직속의 비밀 경찰인 동창(東廠) 책임자도 겸했다. 희종(熹宗)은 목공예(木工藝)에 심취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고, 위충현(魏忠賢)과 유모 객씨(客氏)가 황제의 총애를 믿고 정치를 농단(壟斷)하였다.

희종(熹宗) 시대에는 동림당(東林黨)과 엄당(閹黨)의 당쟁(黨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동림당(東林黨)은 강남(江南) 지방의 사대부(士大夫)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청의파(淸議派)라고도 했다. 엄당(閹黨)은 환관(宦官)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동림당(東林黨)은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의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거점으로 여론을 형성하여 정국(政局)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했다. 위충현은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파(非東林派)의 당쟁(黨爭)을 이용하여 동창(東廠)을 장악하고 권세를 휘둘렀다.

1624년(天啓 4년), 동림당(東林黨)인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 양련(楊漣)이 위충현을 24개의 죄상(罪狀)을 들어 탄핵했다. 위충현은 이 일로 일시적으로 동창(東廠)의 수장(首長)에서 물러나기도 했지만, 다시 희종(熹宗)의 신임을 받고 동림당(東林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彈壓)에 나섰다. 1625년(天啓 5년)에 요동경략(遼東經略)이었던 웅정필(熊廷弼, 1569~1625)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건을 조작하여 동림당(東林黨)의 핵심인물인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 주기원(周起元) 등을 잡아들여 죽였다. 1626년(天啓 6년)에도 고반룡(高攀龍), 주종건(周宗建), 황존소(黃尊素) 등을 죽이고, 동림서원(東林書院)을 폐쇄하고 강학(講學)을 금지시켰다.

동림당(東林黨)을 탄압하면서 위충현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전횡(專橫)을 일삼았다. 1625년(天啟 5년) 희종(熹宗)에게 ‘고명원신(顧命元臣)’의 인(印)을 받았으며, 대신(大臣)들은 사람들에게 ‘위가(魏家)의 각로(閣老)’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그는 요(堯)나 순(舜)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임을 자처하여 ‘요천순덕지성지신(尭天舜徳至聖至神)’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1626년에는 서호(西湖)에 자신의 생사당(生祠堂)를 세웠다. 각지의 관리들은 위충현에게 아부하기 위해 그의 상(像)과 생사당(生祠堂)을 곳곳에 세웠으며, 그를 만날 때에는 ‘황제만세(皇帝萬歲)’를 본떠서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구천세(九千歲)’라고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1627년, 희종(熹宗)이 죽고 그의 동생인 사종(思宗, 재위 1628~1644)이 즉위하자, 위충현은 탄핵을 당하여 펑양[鳳陽]으로 유배되었고, 사종(思宗)은 엄당(閹黨)의 ‘역안(逆案)’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위충현은 펑양[鳳陽]으로 가는 도중에 도주하려 했지만 어려워지자 자살하였고, 그의 시신(屍身)은 천참만륙(千斬萬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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