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제

천계제

[ 天啓帝 ]

요약 중국 명(明)의 제15대 황제로서 묘호(廟號)는 희종(熹宗)이다. 재위 기간에 당쟁이 격화되고,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전횡(專橫)을 하여 명(明)의 쇠퇴와 멸망을 앞당겼다. (재위 1620~1627)
출생-사망 1605 ~ 1627
국적/왕조 중국 명(明)
재위기간 1620년 ~ 1627년
본명 주유교(朱由校)
별칭 묘호(廟號) 희종(熹宗), 시호(諡號) 달천천도돈효독우장문양무정목장근철황제(達天闡道敦孝篤友章文襄武靖穆荘勤悊皇帝)
활동분야 정치

이름은 주유교(朱由校)이고, 묘호(廟號)는 희종(熹宗)이다. 중국 명(明)의 제15대 황제로서 천계(天啓, 1621~1627)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여 천계제(天啓帝)라고 부른다. 1605년(萬曆 33년) 황태자(皇太子)였던 태창제(泰昌帝) 주상락(朱常洛, 1582~1620)의 장자(長子)로 태어났으며, 생모(生母)는 선시(選侍) 왕씨(王氏, ?~1619)이다. 왕씨(王氏)는 천계제(天啓帝)를 가진 뒤에 재인(才人)이 되었으며, 뒤에 효화태후(孝和太后)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1620년(泰昌 원년) 태창제(泰昌帝, 재위 1620)가 황위(皇位)에 오른 지 29일만에 갑자기 죽자 천계제(天啓帝)가 황위(皇位)를 계승하였다. 태창제(泰昌帝)의 총애를 받던 선시(選侍) 이씨(李氏)는 (宦官) 위충현(魏忠賢, ?~1627)과 결탁하여 황태후(皇太后)가 되어 나이 어린 천계제(天啓帝)를 대신해 (垂簾聽政)을 하려고 획책하였다. 하지만 좌광두(左光斗), 양련(楊漣) 등의 동림당(東林黨) 관리들이 이선시(李選侍)에게 건궁(乾清宮)에서 나와 인수전(仁壽殿)으로 이궁(移宮)하도록 압박하여 이선시(李選侍)의 계획을 막았다. 이 사건을 ‘이궁안(移宮案)’이라고 한다.

천계제(天啓帝)는 즉위한 뒤에 황태손(皇太孫) 때부터 자신을 섬겨왔던 위충현(魏忠賢)을 환관(宦官)의 수장(首長)인 사례감(司禮監) 병필태감(秉筆太監)으로 삼았으며, 1623년(天啓 3년)부터는 황제 직속의 비밀 경찰인 동창(東廠) 책임자도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정무(政務)를 내팽개치고 취미인 목공(木工)에만 몰두하였다. 천계제(天啓帝)는 목공(木工)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정원(庭園)에 건청궁(乾清宮)의 모양을 본뜬 궁전(宮殿) 모형을 정교하게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공(木工)에만 몰두한 나머지 국정(國政)은 돌보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일을 위충현(魏忠賢)에게 알아서 처리하도록 맡겨 두었다. 결국 위충현(魏忠賢)은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천계제(天啓帝)의 유모(乳母)인 객씨(客氏)와 결탁하여 전횡(專橫)을 부렸다. 위충현은 1624년 동림당(東林黨)인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 양련(楊漣)의 탄핵을 받아 동창(東廠) 수장(首長)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다시 천계제(天啓帝)의 신임을 회복한 뒤에 동림당(東林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彈壓)에 나섰다. 1625년 동림당(東林黨)의 핵심인물인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 주기원(周起元) 등을 죽였으며, 1626년에는 동림서원(東林書院)을 폐쇄하고 강학(講學)을 금지시켰다.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위충현은 자신이 (堯)나 (舜)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임을 자처하여 ‘요천순덕지성지신(尭天舜徳至聖至神)’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자신의 생사당(生祠堂)를 전국 곳곳에 세웠다.

천계제(天啓帝)의 재위(在位) 기간에 정치 부패와 가혹한 조세 수탈이 계속되자 농민의 생활은 매우 궁핍해졌으며 전국 곳곳에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후금(後金)의 침입은 국방비 지출을 늘려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아갔을 뿐 아니라, 명(明)의 존립(存立)을 위협하였다. 1622년(天啟 2년) 후금(後金)은 왕화정(王化貞, ?~1632)이 이끌던 명군(明軍)을 궤멸시키고 만주(滿洲)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山海關]을 위협하였다. 원숭환(袁崇煥, 1584~1630)이 명군(明軍)을 재정비하여 후금(後金)의 침입을 방위하였지만, 당쟁(黨爭)에 휩싸인 조정(朝廷)은 후금(後金)에 대한 효과적인 방위(防衛)를 어렵게 하였다.

천계제(天啓帝)는 1627년 9월 30일(天啟 7년 8월 11일) 23살의 나이로 부종(浮腫)에 시달리다 죽었다. 그는 3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주유검(朱由檢, 1611~1644)에게 황위를 잇는다는 유언을 남겼다. 천계제(天啓帝)는 덕릉(徳陵)에 묻혔으며, 달천천도돈효독우장문양무정목장근철황제(達天闡道敦孝篤友章文襄武靖穆荘勤悊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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