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정필

웅정필

[ 熊廷弼 ]

요약 중국 명(明) 말기의 장군으로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서 후금(後金)에 맞서 요동(遼東) 방위(防衛)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1622년 왕화정(王化貞)이 그의 전략을 무시하고 후금(後金)을 공격하였다가 크게 패하자 광닝[廣寧]을 포기하고 산하이관[山海關]으로 퇴각하였으며, 그 책임을 뒤집어쓰고 1625년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출생-사망 1569 ~ 1625
비백(飛百)
지강(芝岡)
시호 시호(諡號)는 양민공(襄愍公)
국적 중국 명(明)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호광(湖廣) 강하(江夏, 지금의 湖北 武昌)

자(字)는 비백(飛百),호(號)는 지강(芝岡), 시호(諡號)는 양민공(襄愍公)이다. 호광(湖廣) 강하(江夏, 지금의 湖北 武昌) 출신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에 밝았으며,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1598년(萬曆 26년)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어사(御史)로서 요동(遼東)에 파견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요동(遼東)에서는 누르하치(努爾哈赤, 청 太祖 1559~1626)가 이끄는 여진(女眞)이 강성해져 명(明)을 위협하고 있었다. 누르하치(努爾哈赤)는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1618년 명(明)에 대한 ‘일곱가지 큰 원한[七大恨]’을 공표하고 [撫順]을 공격하였다. 명(明)은 요동경략(遼東經略) (楊鎬, ?~1629)가 이끄는 10여만명의 군대로 후금(後金)을 진압하려 했지만, 1619년(萬曆 47년) 3월 푸순[撫順] 근처의 사르후[薩爾滸]에서 크게 패하였다. 후금(後金)은 이 승리로 카이위안[開原], 톄링[鐵嶺] 등을 점령하여 랴오허[遼河] 동쪽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명(明) 조정(朝廷)은 양호(楊鎬)를 파면하고 요동(遼東)의 사정에 밝은 웅정필(熊廷弼)을 대리사승(大理寺丞) 겸 하남도어사(河南道御史)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웅정필(熊廷弼)은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도망친 유우절(劉遇節) 등 3명의 장수를 처형하며 군(軍)의 기강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요동(遼東) 지역 곳곳에 (墩臺)를 쌓아 후금(後金)의 공격에 대비하고, 성을 보수하고 병력을 기르고 군량미를 확충하여 요동(遼東)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1620년 누르하치가 선양[瀋陽]을 쳐들어왔지만, 웅정필(熊廷弼)은 이를 물리쳤다.

하지만 1620년 광종(光宗, 재위 1620)이 죽고 희종(熹宗, 재위 1621~1627)이 즉위하자, 희종(熹宗)의 총애를 받은 (宦官) 위충현(魏忠賢, ?~1627)의 전횡이 시작되었고, 조정(朝廷)에서는 환관(宦官)들의 엄당(閹黨)과 청의파(淸議派) 관료들의 동림당(東林黨) 사이에 당쟁이 치열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顧慥)와 요종문(姚宗文) 등은 웅정필(熊廷弼)이 후금(後金)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으며, 변경(邊境)에서 임의로 세금을 거두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결국 웅정필(熊廷弼)은 엄당(閹黨)의 모함으로 파면되었고, 원응태(袁應泰)가 요동(遼東)의 방위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원응태(袁應泰)는 1621년(天啟 원년) 후금(後金)에게 크게 패하여 선양[瀋陽]과 랴오양[遼陽]을 빼앗기고 자살하였다.

희종(熹宗)은 베이징[北京]에 계엄을 선포하고 왕화정(王化貞)을 요동순무(遼東巡撫)로 임명하는 한편, 웅정필을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다시 기용하였다. 웅정필은 광닝[廣寧]을 중심으로 군사를 재정비하고, 후금(後金)의 전력을 분석하여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제시했다. 우선은 후금(後金)의 공격에 섣불리 대응하지 말고 방어를 굳건히 하면서, 톈진[天津]과 산둥[山東]의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에 주둔하는 수군(水軍)과 조선(朝鮮)의 도움을 받아 배후를 위협하자는 전략이었다. 웅정필은 그렇게 하면 후금(後金)의 본거지를 뒤흔들어 쉽게 랴오양[遼陽]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엄당(閹黨)의 지원을 받던 요동순무(遼東巡撫) 왕화정(王化貞, ?~1632)은 웅정필의 전략에 반대했다. 그는 푸순[撫順]에서 후금(後金)에 투항한 이영방(李永芳)의 내응(內應)과 가도(椵島)에 주둔하던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의 배후 습격 약속 등을 믿고 후금(後金)의 군사를 완전히 소탕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고, 병부상서(兵部尙書) 장학명(張鶴鳴)도 그를 지지하였다.

1622년(天啟 2년)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랴오허[遼河]를 건너 서평보(西平堡, 지금의 遼寧 台安縣)를 공격해 오자, 왕화정은 광닝[廣寧]을 나가 후금(後金) 군대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전군이 몰살당하는 패배를 당하고 광닝[廣寧]마저 빼앗기고 기성(棄城)으로 도주하였다. 왕화정은 영원성(寧遠城)에서 다시 후금(後金)의 군대를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웅정필(熊廷弼)은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백성들이 피난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 급하다며 광닝[廣寧]을 포기하고 산하이관[山海關]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후금(後金)은 산하이관[山海關] 밖의 요동(遼東)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고 베이징[北京]을 위협하게 되었다.

웅정필과 왕화정은 모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 등이 웅정필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결국 1625년(天啟 5년) 8월에 위충현(魏忠賢)과 엄당(閹黨)의 농간으로 홀로 패전의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되었다. 참수된 웅정필의 목은 변방의 9곳(遼東, 薊州, 宣府, 太原, 大同, 延綏, 固原, 寧夏, 甘肅)으로 조리돌림을 당하였다. 하지만 사종(思宗, 재위 1627~1644)이 즉위하자 대학사(大學士) 한광(韓爌)이 웅정필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결국 1629년(崇禎 2년) 사면되어 ‘양민공(襄愍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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