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애노의 난

원종·애노의 난

[ 元宗哀奴─亂 ]

요약 889년(진성여왕 3) 신라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신라는 하대 이후 진골귀족간의 왕위쟁탈전이 계속되면서도 경주를 중심으로 사치·향락의 풍습이 만연하여 지방에 대한 착취가 더욱 가혹하여졌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점차 토지로부터 이탈되어 갔고 중앙의 정치기강은 문란해졌으며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헌덕왕대(809∼826)부터는 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받은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지식인들은 개혁방안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마침 흉년으로 기근이 일어나자 지방의 주군(州郡)에서 조세를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었고, 재정의 궁핍이 심하였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조세를 독촉하였으나, 이미 중앙의 위령(威令)이 땅에 떨어지고 병제(兵制)가 쇠퇴해지면서 토호(土豪)가 발호하게 된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지방의 동요를 일으켰다. 이에 곳곳에서 조세의 납부를 거절하고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는데, 원종·애노의 난은 그 중 최초의 것이다. 이 난이 발생하자 중앙정부는 나마(奈麻) 영기(令奇)를 파견하여 진압하게 하였으나,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였다. 이 난은 신라 중앙정부가 더 이상 지방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난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농민들의 집권층에 대한 저항은 확대되었다. 또한 중앙의 힘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쌓은 세력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지금의 안성)의 기훤(箕萱), 완산(完山:지금의 전주)의 견훤(甄萱) 등이 잇달아 일어나 신라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원종·애노의 난 본문 이미지 1
원종·애노의 난김헌창의 난

역참조항목

한국의 농민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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