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농민반란

한국의 농민반란

시대

한국사상(韓國史上) 많은 농민반항 중에서 농민반란의 성격을 가진 최초의 것은 신라(新羅) 후기에 사벌주(沙伐州)에서 일어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반란을 비롯하여 죽주(竹州)의 (箕萱), 북원(北原)의 (梁吉), 염주(鹽州)의 유긍순(柳矜順), 괴양(槐壤)의 청길(淸吉) 등을 들 수 있다. 신라의 농민은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서 국가에 각종 잉여생산물과 노동력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위에 농민은 귀족 ·(豪族)의 지주와 국가에 의한 이중적인 수탈(收奪)에 시달렸다.

9세기 말 중앙정부는 재정의 궁핍을 타개할 길이 없어 마침내 지방 주군(州郡)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9세기 이후 흉년과 이 계속되어 빈궁한 농민생활을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농민은 이제 단순한 유망민(流亡民)으로서 그치지 않고 초적(草賊)으로 변하여, 국가의 통치질서에 위협을 주기 시작하여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전국적으로 번져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그 밖에도 경주(慶州) 서쪽에서는 적고적(赤袴賊)이라 하여 붉은 바지를 입은 농민군이 봉기하여 경주를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농민 반항은 신라를 몰락으로 이끌어가는 데는 크게 작용하였으나, 그들 자신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주동세력이 되지는 못하였다. 여기에 신라 후기의 농민봉기가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성이 있다.

시대

고려시대에는 중기의 무신의 난 때 도탄에 빠진 농민과 천민(賤民)이, 무신의 하극상(下剋上) 풍조에 자극받아 자신의 신분해방을 위하여 또는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항쟁을 벌였다. 농민의 궐기는 무신의 난 앞에도 산발적으로 있었으나, 무신의 난 뒤에는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으로 경상도의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의 농민봉기는 1년 반 이상에 걸친 것이었으나 진압되고 말았다. 최충헌(崔忠獻) 집권 이후 일어난 하층사회에서의 봉기는 전에 비하여 조직성이 강화되고 신분해방과 권력탈취라는 투쟁목적이 뚜렷해졌다는 점과, 투쟁의 주체자가 농민뿐만 아니라 노비(奴婢)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시대

조선시대 농민의 항거는 1862년( 13) 진주(晉州)에서 일어난 농민의 봉기를 비롯하여 많은 민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勢道政治)라는 정치기강의 문란과 관료체제의 파탄 및 수취체제(收取體制)의 문란에서였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정이 해결되지 않은 채 외세(外勢)의 침투가 가중되어, 94년 동학(東學)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동학교문 자체의 종교적 운동이 아니라 동학의 조직력과 영향력에 다수의 농민대중이 참여하여 전개된 사회혁신운동이었고 농민운동이었으며 자주운동이었다. 군의 섬멸작전에 의해서 유린되었지만, 개항(開港)을 전후하여 (儒生) 사이에 싹튼 위기의식은 구군졸(舊軍卒)의 반발을 거쳐서 동학 농민군의 봉기에 이르는 사이에 민중의 개혁사상으로, 그리고 민족의식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농민반란 본문 이미지 1철종고종홍경래의 난개령민란진주민란세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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