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상
[ 吳熙常 ]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조 때 한성부주부 ·황해도도사 등을 지내다가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독서수기(讀書隨記)》등의 저서를 남겼다.
출생-사망 | 1763 ~ 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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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해주(海州) |
자 | 사경(士敬) |
호 | 노주(老洲) |
시호 | 문원(文元) |
주요저서 | 《독서수기(讀書隨記)》 《노주집(老洲集)》 |
본관 해주(海州). 자 사경(士敬). 호 노주(老洲). 시호 문원(文元). 1800년(정조 24) 천거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가 되고 장릉(長陵)참봉 ·돈령부(敦寧府)참봉 ·한성부주부 ·황해도도사 ·사어(司禦) 등을 지낸 뒤, 1818년 경연관(經筵官)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광주(廣州)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였다. 그 뒤에도 지평 ·장령 ·집의 ·승지, 각 조(曹)의 참의 등 벼슬도 고사하였으며, 1829년 세손부(世孫傅), 1832년 찬선(贊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양설에 절충적 태도를 취했으나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양설에 대하여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저서에 《독서수기(讀書隨記)》 《노주집(老洲集)》이 있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