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회

시중회

[ 時中會 ]

요약 1934년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한일 합동으로 조직한 친일단체.
구분 정치단체
설립일 1934년
설립목적 친일활동
주요활동/업무 자치운동 전개, 실천강령 제정, 친일행위
소재지 서울
규모 회원 5만 명

1934년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제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 및 일선융합을 강조하며, 조선총독부의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와 경무국장 이케다[地田淸]의 주도로 조직된 단체로서, 한국 쪽에서는 중추원 참의 최린(崔麟), 동양척식회사의 감사를 맡았던 박영철(朴榮喆) 등이 주도했다.

최린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손병희(孫秉熙) 사후 천도교의 실질적인 1인자에 올랐으나, 세 차례에 걸쳐 자치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미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이탈했는데, 시중회를 조직할 때 천도교 신파인 정광조·조기간 등을 끌어들였다. 이밖에도 김사연·장직상 등 친일파 인사가 동참했고, 친일관료 김대우(金大羽)가 총독부와의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한일 민간 유력자들이 총망라된 조직으로서 회원은 5만 명에 이르렀다.

실천강령으로서 신생활의 수립, 신인생관의 확립, 일선일가(日鮮一家)의 결성, 근로신성(勤勞神聖)의 체행(體行), 성(誠)·경(敬)·신(信)의 실천 등 5개항을 내세웠는데, 주로 정신적인 친일을 강조했다. 1938년 12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합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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