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

요약 러시아의 작곡가.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썼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출생-사망 1906.9.25 ~ 1975.8.9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페테르부르크
주요수상 제1회 스탈린상(1940)
주요작품 《피아노5중주곡》(1940) 《제7교향곡》(1942) 《10의 시》(1951)

페테르부르크 출생. 어려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제2교향곡》(1927) 《제3교향곡》(1929), 그리고 《피아노·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1933) 《피아노전주곡집》, N.V.고골에 의한 오페라 《코》(1930), 발레 《황금시대》(1930)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19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詩)》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1937∼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19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발레음악·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연보
출생 1906.9.25~ 사망 1975.8.9

1906

9월 25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

1919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 슈테인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움.

1925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작곡과 졸업. 교향곡 제1번 작곡.

1932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작곡. 니나 바르자르와 결혼.

1936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레 《맑은 시냇물》이 《프라우다》지에서 형식주의적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음. 교향곡 제4번 공연 철회함.

1939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로 취임.

1942

교향곡 제7번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둠.

1949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작곡하여 초연.

1957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교향곡 제11번 작곡.

1966

현악 4중주곡 제11번 작곡. 심장발작으로 쓰러짐.

1975

비올라 소나타 작곡(마지막 작품).
8월 9일 모스크바에서 심장병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