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혁명에서 소련붕괴까지의 러시아음악

10월혁명에서 소련붕괴까지의 러시아음악

혁명 전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중심으로 한 국민악파가 독특한 지방색과 청신한 기교로 세계에 진출하였으나, 혁명에 의하여 음악교육제도, 작곡가·연주자의 생활, 사회활동, 일반 대중의 음악생활 등이 크게 변화하였다. 19세기에 예술음악의 창조·보급에 공을 세운 것은 거의 대러시아인이고 드물게는 소러시아인도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북·서·남부의 여러 공화국 출신자도 많고, 하탸투랸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후진지역이었던 변경의 여러 공화국·자치공화국 등도 독자적인 작곡가연맹이나 음악원을 갖고, 자국의 음악 수준에 따른 음악정책을 취했다. 그 내용은 민속음악의 연구와 그 성과의 출판, 노동자·농민과의 협력, 유럽의 악기 구입, 관현악단의 결성 등으로 인종이나 언어를 달리하는 여러 공화국의 자주적인 음악활동이다.

또 각 공화국마다 작곡가동맹이 결성되고, 그 연합체가 곧 전소련 작곡가동맹이다. 거기에는 구소련의 음악적 상황이 반영되기 때문에 선진·후진의 의견의 평균치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작곡가동맹 중에서는 러시아공화국 작곡가동맹이 가장 대표적이고, 여기서는 프로코피에프·쇼스타코비치·카발렙스키 등이 배출되었다.

혁명 후 10여 년은 음악가들의 생활도 어려웠고, 정치적 이유에서 국외로 떠나는 작곡가도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나 스트라빈스키 등도 망명하여 낭만주의와 국민주의를 지켜나갔다. 1932년에 공산당에 의한 제1회의 작곡가비판이 있었고, 작곡분야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제창되었으나, 그 말의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 호응을 받지 못하여, 결국은 뛰어난 작품도 태어나지 않았다. 이 때는 토론내용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제2회의 비판은 지다노프에 의해 행해져 결론만이 공표되었다. 이 때 쇼스타코비치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의 정책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정통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현과 개혁 사이에서 러시아의 음악도 크게 변조되었다.

참조항목

, , , ,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