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 왕조

셀주크 왕조

[ Seljuk ]

요약 오구즈 또는 구즈 투르크멘이라고 불리는 유목 종족의 대집단에서 파생한 셀주크족(族)이 세운 왕조.
비잔틴 요새

비잔틴 요새

그 명칭은 족장(族長) 셀주크에서 연유한다. 시르다리야강(江)의 하류 지역에서 발흥하여 투르크계의 이슬람 국가 가즈니왕조의 세력을 몰아내고 호라산을 점유하여 지배권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아제르바이잔·이라크·시리아·소아시아에까지 확대되었다. 본가(本家)는 대 셀주크 왕조(1037∼1157)이고, 분가(分家)는 각 소령(所領)에 따라 케르만 셀주크 왕조(1041?∼1187), 룸 셀주크 왕조(1077∼1307), 시리아 셀주크 왕조(1094∼1117), 이라크 셀주크 왕조(1117?∼1194) 등으로 불린다. 대 셀주크 왕조의 건설자 토그릴베그(재위 1037∼1063)는 족장 셀주크의 손자이다. 이란을 중심 지역으로 하여 테헤란 근처의 레이를 수도로 하였으며,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요청으로 바그다드에 들어가, 시아파(派)의 부와이왕조 세력을 일소하여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보호자로서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제2대 알프 아르슬란과 제3대 말리크샤의 치세가 황금시대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가장 번영하였다. 그 번영은 이란인(人) 재상 니잠알물크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는 정치상의 공적뿐만 아니라, 내정·군사면의 정비에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융흥이 빨랐듯이 쇠퇴와 멸망도 빨라서 수니파(派)에 반항하는 광신적인 암살교단의 공세와 왕족 사이의 격렬한 정쟁(政爭), 그리고 악역(惡疫)의 유행 등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결과 제8대 산자르시대에 멸망하였다. 분가된 셀주크 중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영속성을 띤 것은 아나돌 셀주크왕조로서 유럽 십자군(十字軍)과 대결하면서도 소아시아의 투르크화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이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에도 유명무실한 존재로 있다가 14세기 초기에 멸망하였다.

셀주크 문화는 이란의 옛 전통을 살리면서 그것을 이슬람적으로 꽃피운 수니 문화라 할 수 있다. 니잠 알물크가 문화의 융흥에 노력한 결과 학술·예술면에서 볼 만한 것이 많으며, 천문학자·수학자·의학자이며 시인인 우마르하이얌과 이슬람의 대신학자 알가잘리 등은 유명하다. 특히 학예진흥을 위한 메데레세(Mederese:學林)·종교희사재단(宗敎喜捨財團)·도서관 등이 개설되었고, 이슬람 세계의 저명한 학자가 초청되었다. 또한 구빈시설(救貧施設)·병원·대상(隊商)숙박소 등도 설치되었고, 공예면에서는 아름다운 견직물, 융단, 정교한 금속세공, 모자이크용 착색 타일이 있었으며 도기류는 아름답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것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