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릉도감

산릉도감

[ 山陵都監 ]

요약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졸(卒)한 직후부터 왕릉이나 왕비릉을 조성하기 위해 능이 완성될 때까지 존속하였던 한시적인 기구.
거중기 전도

거중기 전도

구분 임시기구
설립일 조선시대
설립목적 왕릉이나 왕비릉을 조성
주요활동/업무 능의 조성을 총괄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현직 의정이 최고위직인 총호사(總護使)를 담당하여 능의 조성을 총괄하였다. 왕(왕비)의 능을 조성하는 일은 왕실의 권위와 관계되는 문제였으므로 통상 사망 후 5개월 이내에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능의 조성공사는 그 이전에 마무리되어야 했다. 왕(왕비)이 죽으면 총호사, 제조(提調), 낭청(郎廳) 등으로 산릉도감의 인원이 편성되고, 산릉도감이 설치되면 지관(地官)을 파견하여 능을 조성할 지역을 가린다.

공사와 관련하여 각종 날짜를 정할 때에는 총호사 및 산릉도감의 당상관, 관상감(觀象監)의 영사(領事), 제조, 예조의 당상관 등이 지관을 인솔하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회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능을 조성할 지역과 공사일정이 확정되면, 필요한 인력을 산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능을 어느 곳에 조성할 것인가를 놓고 때로 정치적인 대립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효종이 죽은 후 그 능자리에 대해 수원(水原)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와 건원릉(健元陵)을 주장하는 서인(西人)들 사이에서 대립이 있었고, 현종 말에 다시 크게 문제되기도 했던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능을 조성하는 과정에는 돌을 새기고 옮기는 일, 흙을 다지고 풀을 뽑는 일, 능에 부속되는 건물 등을 만드는 일 등이 포함되었으므로 많은 인력이 요구되었다. 인조(仁祖) 때만 하더라도 능을 만드는 데 연인원 27만 명이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공사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은 원칙적으로 능이 조성되는 지역에서 조달되었으나, 각종 자재를 반입하는 경우에는 그 부담이 인근 지역이나 여타 각 도(道)로 파급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연군(烟軍)·승군(僧軍)·군인(軍人) 등이 국가에 대한 의무의 하나인 부역이라는 형식을 통해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역에 의한 산릉 조성은 17세기 초 이래로 단계적으로 점차 모립(募立)에 의한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모립 방식에 의해 고용 형태로 공사가 운영됨으로써 국가는 민을 징발하여 사역하는 단계의 비효율성을 극복하였으며,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사용 각종 운반기구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정조(正祖) 때 수원성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다산 정약용의 설계에 따라 토목공사용 기구인 거중기(擧重機)가 제작되어 사용된 것 역시 산릉조성 공사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서 인력동원체계가 변화되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이러한 인력 수급상의 변화는 새로운 임금 노동자층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참조항목

산릉도감의궤

역참조항목

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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