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마라톤대회

보스턴마라톤대회

[ Boston Marathon ]

요약 미국 보스턴에서 매년 4월에 개최되는 세계적인 마라톤 경주대회.
보스턴 마라톤 2012

보스턴 마라톤 2012

주최 보스턴 육상경기 클럽
시작연도 1897년
대회주기 매년
대회기간 4월
참가규모 전세계

미국 보스턴(Boston)에서 매년 4월에 개최되는 세계적인 마라톤 경주대회로, ‘아메리칸 마라톤’이라고도 한다. 런던마라톤, 로테르담마라톤, 뉴욕마라톤과 함께 세계 4대 마라톤대회 가운데 하나이다. 올림픽을 제외하고 1997년부터 유일하게 참가자의 자격을 제한하는 대회로도 유명하다.

해마다 참가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1999년 대회는 1997년 10월부터 1999년 3월 사이에 공인 마라톤대회에서 완주한 18세 이상 45세 이하, 3시간 이내의 기록보유자인 사람만이 참가할 수 있다. 참가인원도 1만 5000명으로 제한하였다. 1972년부터는 여자선수도 참가하였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마라톤 애호가들은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했다는 사실 자체를 큰 영광으로 안다.

1775년 4월 19일 영국군이 보스턴을 공격한다는 급보가 있자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이에 맞서서 싸움으로써 미국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뒤 미국의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와 메인주(Maine)에서는 독립전쟁 때의 애국적 투쟁을 기념하여 해마다 4월 19일을 ‘애국자의 날’로 정하여 각종행사를 벌이는데 이 대회도 1807년 이래 그 행사의 하나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제1회 대회는 1897년에 열렸으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마라톤대회로서는 올림픽경기대회 다음으로 오래되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경기대회의 경기종목으로 채택된 마라톤에 흥미를 느낀 미국인들이 같은해 9월에 역사상 두 번째로 뉴욕에서 마라톤 경기대회를 열었다. 제1회 올림픽경기대회에 참가했던 보스턴 육상경기 클럽의 회장 브라운의 발안으로, 올림픽 마라톤이 마라톤전쟁의 전설과 연관지어 성공한 선례를 참작하여 ‘애국자의 날’에 독립전쟁 때 유서 깊은 코스에서 그 의의도 되새기고 마라톤의 경기실력 향상도 겸하여 이 대회를 개최한 데서 비롯된다.

코스를 보스턴과 독립전쟁 최초의 교전지로 유명하여 아메리카 자유의 탄쟁지라고도 하는 렉싱턴(Lexington)을 왕복하는 25마일의 거리로 정하였다. 그후 국제육상경기연맹이 마라톤 거리를 42.195㎞로 정했으므로 1925년부터는 보스턴 교외의 홉킨턴으로부터 보스턴 시내의 보스턴 육상경기 클럽 앞까지 편도 코스로 변경되었다. 이 코스에는 결승점을 10㎞ 앞두고 ‘심장 파열 언덕(Heart Break Hill)’이라는 오르막길의 유명한 난코스가 있다.

1957년 정밀측정한 결과 코스의 정규거리가 약 1,000m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어 그해 대회부터 다시 재조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1918년 대회는 중지되었으나 그후 1949년 대회를 제외하고 계속하여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주최는 처음부터 보스턴 육상경기 클럽이 하고, 1925년부터는 미국 선수권대회를 겸한다.

국제적인 대회로 격이 높아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이며, 한국은 1947년 제51회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는데, 서윤복(徐潤福)이 2시간 25분 39초로 신기록을 세우며 1위를 하였으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경기대회의 마라톤 동메달리스트 남승룡(南昇龍)이 2시간 48분 40초로 12위를 차지하였다. 1950년 제54회 대회에는 손기정(孫基禎) 감독의 인솔 아래 재도전하여 함기용(咸基鎔:2시간 32분 39초), 송길윤(宋吉允:2시간 35분 58초), 최윤칠(崔崙七:2시간 39분 45초)이 1·2·3위로 입상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국내의 마라톤 붐을 가속화시켰다.

그후 6·25전쟁으로 참가하지 못하다가, 1957년 제61회 대회에 서윤복 감독과 최윤칠 코치의 지도 아래 다시 참가했으나 임종우(林鍾禹:2시간 24분 55초)와 한승철(韓昇哲:2시간 28분 18초)이 각각 3위와 5위로 입상하는 데에 그쳤다. 1993년 제97회 대회에서 김재룡이 2위를 차지하였으며, 1994년 제98회 대회에서는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黃永祚)가 2시간 8분 9초로 4위에 그쳤지만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2000년 4월 18일 제104회 대회에서는 케냐의 엘리야 라가트가 에티오피아의 게자헨게 아베라와의 막판 경기에서 2시간 9분 47초로 간발의 차로 우승하였으며, 여자부에서도 케냐의 캐서린 은데레바가 2시간 26분 11초로 우승였다. 케냐는 1991년부터 10년 연속 남자부 정상에 오르는 동시에 1897년 출범한 대회사상 처음으로 남녀 동반우승 신기록까지 수립하였다. 2000년 대회는 1996년 38,708명에 이어 역대 2위 규모인 17,813명이 참가하는 동시에 ‘마(魔)의 4연패 벽’이 깨지지 않고, 1972년에 시작된 여자부를 포함해 1∼3위가 근소한 차로 우승을 다투었다.

2001년 4월 16일 열린 제105회 대회에서는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리스트인 이봉주(李鳳柱)가 2시간 9분 43초로 우승하여, 한국은 지금까지 총 10회에 참가하여 1위를 3회 차지하였다. 2002년 4월 16일 열린 제106회 대회에서는 케냐의 로저스 롭이 2시간 9분 2초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봉주는 5위를 차지해 2회 연속 우승에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