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보르자

체사레 보르자

[ Cesare Borgia ]

요약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전제군주이자 교황군 총사령관. 아버지이자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의 지원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로마냐 지방을 정복해 지배했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이상적인 모델로 《군주론》을 집필했다.
체사레 보르자

체사레 보르자

출생-사망 1475/76 ~ 1507
별칭 발렌티누아공작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정치

1475년 8월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주교(主敎) 추기경(樞機卿)으로 로마 교황청 차관이자 실세였던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였다. 그의 어머니는 반노차 데 카타네이(Vannozza Cattanei)라는 여인이며 결혼 전까지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의 정부(情婦)였다. 로드리고 보르자는 체사레 보르자의 친모 외 여러명의 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서출 자녀 또한 여럿을 두었다. 로드리고와 반노차 사이에는 체사레 보르자 외 후안, 루크레치아, 호프레를 두었는데 여동생 루크레치아는 미모가 매우 뛰어났던 여인으로 유명하다. 체사레는 여동생과 근친상간 관계로 알려졌다.

1491년 로드리고는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알렉산데르 6세로 호칭 되었으며 1493년 마침내 체사레 보르자를 공식적인 아들로 공표하였다고 전한다. 체사레는 아버지 로드리고의 깊은 관심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라틴어를 익혔다. 또한 추기경이었던 아버지의 배려로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관면장을 받아 후일 추기경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482년 체사레는 겨우 7세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 고위 성직자로 임명되었으며 부주교, 수도원장, 재무관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어린 체사르가 벌어들인 수익은 모두 로드리고 추기경이 관리했으며 체사레 양육비와 교육비로 집행하였다. 체사레의 일생에서 그의 아버지 로드리고의 영향은 지대하다. 일생의 진로를 아버지가 결정하였으며 체사레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1489년 로마를 떠나 페루자에 있는 사피엔차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이곳에서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여러 공화국의 정치가와 교류하였다. 1491년 15세 때 아버지에 의해 나바라 공화국 팜플로나(Pamplona) 교구의 주교에 임명되었으며 교구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수입을 얻게 되었다. 같은해 피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피렌체 공화국 피사(Pisa)로 갔으며 이곳에서는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Medici) 가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메디치 가(家)는 유럽 최고의 거상이자 명문가였으며 피렌체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아들 조반니와 피사대학에서 함께 수학하였고 둘은 나이도 같고 장차 교황을 목표로 하는 야망도 같았다.

1492년 8월 11일 로드리고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자 체사레의 운명도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493년 9월 체사레는 아버지에 의해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1494년 나폴리공국의 왕위 임명을 두고 불만을 품은 프랑스 샤를 8세(Charles VIII,1470.6.30~1498.4.7)가 로마를 침공하자 산탄젤로 성(Castel Sant'Ángelo)에 갇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퇴각하자 프랑스 잔류군을 소탕하였고 나폴리 왕 대관식에 대리 참석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방탕한 사생활로 나폴리에서 매독에 걸려 일생동안 고생하게 된다. 

1498년 추기경직을 포기하였고 로마냐에 왕국을 세워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왕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정치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에 갔으며, 국왕 루이 12세와 친숙해져 발렌티누아공작이 되었고 그가 추천하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영주들을 정벌하였으며, 1501년까지 로마냐 지방을 정복하여 지배영역으로 만들었다. 또 나폴리왕국에도 침입하였고, 밀라노와 피렌체공화국를 위협하여 항복과 동맹서약을 받아냈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중부지역인 로마냐를 통치하는 군주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를 통해 자신의 정치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체사레는 부친 알렉산데르 6세가 죽기전에 목적을 달성해야만 했다. 체사레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처사로 사람들을 떨게하였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이상적 전제군주로 보고 이탈리아 통일의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은퇴 후《군주론》을 집필했던 모델이 바로 체사레 보르자였다.

그러나 1503년 8월 18일 말라리아에 걸린 알렉산데르 6세가 죽고, 보르자 가(家)의 숙적(宿敵)인 율리우스 2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체사레는 실각하여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 메디나 델 캄포에 있는 라 모타 요새에 이감되었다가 탈출하여, 나바라왕국 팜플로나로 갔다. 나바라왕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페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전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나바라왕국 내 페르디난드 일파인 루이 드 뷰몽 백작이 배신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1507년 3월 12일 체사레는 드 뷰몽 백작의 라히아쥐 성을 공격하다 적에게 포위되어 스물다섯 군데나 자상을 입고 죽었다.

역참조항목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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