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열

박태열

[ 朴泰烈 ]

요약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족회(韓族會),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에서 활동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폭파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였고, 독립신문의 인쇄책임자로 지냈다. 사후 대통령표창,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생-사망 1874 ~ ?
본명 종식
별칭 종오, 원직, 운서, 태을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황해 은율
주요수상 대통령표창(1963), 건국훈장 독립장(1968)

본명은 종식(綜植)이며 이명(異名)은 종오(綜梧)·원직(元直)·운서(雲瑞)· 태을(太乙)이다. 황해도 은율(殷栗)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였다. 1919년 오동진(吳東振)·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 등과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고, 1920년 1월 관뎬현[寬甸縣]에서 오동진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 결사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7월 미국의원단의 한국방문을 계기로 독립의지를 알리고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제2결사대장으로 평양에 파견되어, 장덕진·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안경신(安敬信) 등과 평안남도청 경찰부·평양부청·평양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장덕진 등과 함께 본영으로 돌아왔으나, 이 사건으로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관뎬현에 광복군총영 통신사무부를 설치하고 각 독립단체와 연락을 취하였으며, 1922년 8월에는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박진(朴震)·장덕진 등과 국민대표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여 독립운동 중단에 대한 구제책을 제시하였다.

1926년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폭파를 위한 자금을 마련해 주었고, 1927년에는 상하이로 가서 독립신문의 인쇄책임자로 만주와 미국 등지에 신문을 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5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936년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