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립
[ 朴大立 ]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형조판서·이조판서·호조판서·우찬성·돈령부판사 등을 지냈다.
![박대립선생 묘](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765_000_358/20190926073521090_641N89YLW.jpg/10173372.jpg?type=m250&wm=N)
박대립선생 묘
출생-사망 | 1512 ~ 1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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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함양(咸陽) |
자 | 수백(守伯) |
호 | 무위당(無違堂)·무환(無患) |
활동분야 | 정치 |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위당(無違堂) 또는 무환(無患)이며, 박세영(朴世榮)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양주(楊州)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형조좌랑 때 수십 년 묵은 송사(訟事)를 판서에 항변하여 종결시켜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추천으로 지평(持平)이 되었다.
1567년(선조 1)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부제학이 된 후 대사간을 지냈으며,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어 형조판서로 특진하였다. 그뒤 이조판서·호조판서 등을 거쳐 우찬성이 되고 1582년 돈령부판사를 지낸 뒤 다시 우찬성·좌찬성이 되었다. 《명종실록》에 그 사람됨에 대하여 "종족(宗族)과 화목하고 치산(治産)을 일삼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데 후(厚)함을 다하였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