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

토마스 모어

[ Thomas More ]

요약 이상적 국가상 그린 명저 《유토피아》를 쓴 영국의 정치가·인문주의자. 르네상스 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에라스뮈스와 친교를 맺었다. 외교교섭에도 수완을 발휘했다. 해학취미의 소유자로 명문가·논쟁가였다.
토마스 모어 초상

토마스 모어 초상

출생-사망 1478.2.7 ~ 1535.7.6
국적 영국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피코 델라 미란돌라전(傳)》(1510) 《유토피아》(1516)

런던의 법률가 존 모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캔터베리 대주교(大主敎) 존 모턴을 섬기고, 나중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요구로 중퇴하여 법률가가 되려고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 대륙의 르네상스 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에라스뮈스와 친교를 맺었다.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愚神禮讚)》(1511)도 모어의 집에 묵으면서 집필한 것이다. 법학원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고, 의회에서도 의석을 차지하였다.

1515년에는 통상(通商)문제로 네덜란드에 건너가, 외교교섭에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상적 국가상(國家像)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는 그때의 여행 중에 쓰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완성하였다.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29년에는 대법관(大法官)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고 1532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34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1535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인문주의자로서 해학취미(諧謔趣味)의 소유자로 신랄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나, 동시에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이며, 이름난 명문가(名文家)·논쟁가(論爭家)로서 서민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작품에 《피코 델라 미란돌라전(傳)》(1510), 《리처드 3세전》(1543) 등이 있다. 1935년, 로마 교황은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