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자의 활동과 각국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활동과 각국의 르네상스

시민적 인문주의자가 르네상스 초기에 이탈리아의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다. 고대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인문주의자가 코무네와 군주국에 관직을 구하는 예가 증대하였다. 인문주의적 교양이 출세의 수단이 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는데, 정치체제는 다르지만 알프스 이북의 절대군주국가에서도 인문주의자를 관료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외국으로 나가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로써 알프스 이북에서의 인문주의의 보급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가 그들 각자의 문화적 전통과 결합된 독자적인 르네상스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대부분이 종교문제에 무관심했거나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융합을 도모하였음에 반하여,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언어문헌학적 방법을 성서연구에 적용하여 신앙문제를 취급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지역의 르네상스는 과 연결되었는데, 이와 같은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는 구약성서의 이해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연구에 헌신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했던 독일의 J.로이힐린과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J.르페브르 데타플 등이 있다. 영국의 J.콜레트와 T.모어도 이들의 범주에 속하며, 북방의 기독교적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시대의 지식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D.에라스뮈스도 초대 교회의 순박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인문주의자였다.

이러한 종교적 특징과 더불어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절대왕정의 전단계적 과정이라는 특징을 띠었는데, F.라블레와 M.몽테뉴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강한 귀족적 ·궁정적 성격을 띠며, 이는 곧 루이 14세의 절대왕조문화에 연결되었다. 영국의 경우에도 E.스펜서의 《페어리 퀸》과 같은 대서사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송시(頌詩)였으며, 셰익스피어가 낳은 드라마의 극치는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파냐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는데, 세르반테스의 소설도 가톨릭 신앙과 기사도 정신이 강조되었던 에스파냐 절대주의의 산물이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는 나라에 따라 각기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던 복잡한 문화현상이고, 따라서 근대문화와의 관계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고전고대(古典古代)의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흥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활동에 종사하는 인문주의자들은 공통의 교양과 언어와 이상을 통하여 공동영역을 분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의 지식인에 국한된 것이지만 에라스뮈스가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등을 주유했던 것과 같이 종교 이외의 세속문화에 대해서도 공통의 지반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이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 뿌리를 르네상스에서 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실상 르네상스시대에는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이나 창조는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기(手記)에 나타난 견해를 근대과학의 예견(豫見)이라고 보았던 종래의 생각도 수정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록은 중세 말기의 스콜라 학자에 의하여 이미 발견되었던 것을 다만 메모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에서 보는 르네상스의 중요성은 근대과학의 진원지로서가 아니라, 종래의 학자적 사고의 전통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職人)의 전통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어 실험과 실용의 정신을 낳았다는 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은 중세를 이어온 과학의 변화와 더불어 16 ·17세기의 J.케플러, 갈릴레이 등을 낳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뉴턴으로 이어졌다.

참조항목

, , , , , , , ,

카테고리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