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헨리 8세

[ Henry VIII ]

요약 잉글랜드의 왕(재위 1509∼1547).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궁녀 앤 불린과 결혼하려 하였으나 로마 교황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가톨릭 교회와 결별, 수장령(首長令)으로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헨리 8세의 초상

헨리 8세의 초상

출생-사망 1491.6.28 ~ 1547.1.28
국적/왕조 영국
재위기간 1509년 ~ 1547년
활동분야 정치

 

출생과 왕위 계승

1491년 영국 튜더왕조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형 웨일스 공 아서(Prince of Wales, Arthur)가 15세에 요절하자 유일한 왕위 계승자로서 분쟁없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헨리 8세는 키가 약 188cm이고, 몸집이 크고 강한 체력을 가진 청년이었다.

캐서린과 결혼

그는 형의 부인이었던 캐서린(Catherine)과 결혼하였는데 캐서린의 아버지는 스페인 왕 페르디난도이며 어머니는 카스티야의 군주 이사벨라(Isabella)였다. 부왕(父王) 헨리7세가 이룩해 놓은 강성해진 국력은 헨리8세의 왕권을 탄탄하게 해주는 기반이 되었으며 당시 왕권은 신에 의해 주어진다는 왕권신수설에 힘입어 안정적인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헨리 8세는 국정운영보다 사냥과 오락에 심취하였지만 절대주의 국가의 왕으로 추앙되었다.

신성동맹으로 프랑스 원정

1513년 명성과 영웅심에 도취하여 신성동맹(Holy League)에 가입하고 프랑스 정복을 위해 원정에 나섰지만, 아무런 실익을 얻지 못한 채 국력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캐서린과 이혼과 로마 가톨릭과 결별

1527년 경부터 시녀 앤 불린(Anne Boleyn)을 흠모하여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캐서린과 결혼을 무효로 하지 않으면 결혼이 성립될 수가 없었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딸을 두었지만 캐서린과 결혼무효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로마 교황 클리멘스 7세가 캐서린과 결혼을 무효로 인정하지 않자 결국 가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1534년 수장령(首長令)으로 영국 국교회(國敎會)를 설립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1536, 1539년에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교회재산을 몰수하였다.

유럽에서 정치적인 고립과 종교개혁

정치적으로는 당시 유럽 외교 정치의 커다란 축인 로마교황과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도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스페인 페르디난도 왕이 사망하면서 카를5세의 권한이 커지자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에게 패배하자 헨리8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결혼을 무효로 하려던 캐서린 왕비가 카를 5세의 이모이기 때문에 결혼무효를 승인받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 결국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왕권강화

종교개혁 이외에도 귀족들과 종교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였다.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지배와 방비를 강화하고,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몇 차례나 대륙에 출병하였다. 여섯 왕비 중 두 왕비와 울지, T.크롬웰, T.모어 등의 공신(功臣)을 처형하는 등 잔학한 점도 있었으나, 그 통치는 국민의 이익을 크게 배반하지 않았으며, 부왕 헨리7세가 쌓은 절대왕정을 더욱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