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만리장성

[ Great Wall of China , 萬里長城 ]

요약 중국의 성벽 유적.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만리장성

만리장성

원어명 万里长城
국가 중국
지정일 1987년
분류 문화
테마분류 문화유산
소재지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허베이[河北],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산시[山西], 내몽골, 산시[陝西], 닝샤[寧夏], 간쑤[甘肅], 신장[新疆], 산둥[山東], 허난[河南],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쓰촨[泗川], 칭하이[靑海], 그밖의 자치주
좌표 N40 25 E116 05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세운 성벽으로 ‘장성(長城)’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쌓은 것이다. 길이가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자위관[嘉峪關]에서 동쪽의 허베이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까지 2,700㎞에 이른다. 지형의 높낮이 등을 반영하면 실제 성벽의 길이는 6,352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유산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며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만리장성의 역사

중국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은 춘추전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시대의 제(齊)ㆍ초(楚), 전국시대의 연(燕)ㆍ조(趙)ㆍ진(秦) 등이 유목민족과의 접경에 성벽을 쌓아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이라고 불리는, 동서로 길게 이어진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이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흉노(匈奴)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춘추전국시대에 각 나라가 만든 북방의 요새와 성벽을 연결시켜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당시의 장성은 지금 남아 있는 장성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쪽으로는 지금의 간쑤성 민현[岷縣] 지역인 임조(臨洮)에서 동쪽으로는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랴오양시[遼陽市] 지역인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의 장성은 성벽으로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니라, 요충지에 요새와 초소 등을 만들어 구축한 국경 방어선의 의미가 강했다. 성벽을 쌓은 경우에도 흙을 다져서 쌓은 토벽이었으며, 높이도 2미터 정도로 높지 않았다.

시황제가 쌓은 장성은 한(漢)나라 때에도 국경 방어를 위해 중시되며 확장되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흉노ㆍ선비(鮮卑) 등이 북방민족이 화북지방으로 진출해 왕조를 세우면서 기능을 잃고 방치되었다. 그러다 탁발부(拓跋部)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화북지방을 통일해 남북조시대로 접어들면서, 북방 방어를 위해 다시 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베이징[北京] 일대인 평성(平城)을 도읍으로 삼은 북위는 북방의 유연(柔然)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서쪽으로는 인산산맥[陰山山脈]의 남쪽 기슭에서 동쪽으로는 발해만(渤海灣)에 이르는 지역까지 장성을 쌓았다. 그 뒤 북제(北齊) 때에는 돌궐(突厥)의 남하를 막기 위해 산하이관 지역까지 장성을 확장했다. 이 시기의 장성은 진ㆍ한 시대보다 동쪽 지역은 훨씬 남쪽에 만들어졌으며, 서쪽 지역은 북쪽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장성은 당(唐)나라 이후에 다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명(明)나라가 들어서면서 북방 방어를 위한 장성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특히 명나라가 제3대 왕인 영락제(永樂帝) 때에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면서 몽골족의 재침을 막기 위한 장성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영락제 때에 시작된 명나라의 장성 축조는 제5대 왕인 선덕제(宣德帝) 때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특히 1449년 제6대 왕인 정통제(正統帝)가 오이라트 정벌에 나섰다가 붙잡혀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진 뒤로는 장성의 개축과 연장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명나라 때 세워진 장성은 북위와 북제 시대에 만들어진 장성을 기초로 하였는데, 특히 수도인 베이징 부근은 이중으로 더욱 견고하게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요충지마다 벽돌로 성벽을 새로 쌓았는데, 명나라 때 세워진 장성의 평균 높이는 7.8m, 바닥의 두께는 6.5m에 이른다. 그래서 명나라 때에 이르러 간쑤성 서부의 자위관에서 허시후이랑[河西回廊]과 인촨평원[銀川平原] 북쪽의 고원 지대를 거쳐 허베이성 북쪽의 옌산산맥[燕山山脈]을 가로질러 산하이관에 이르는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를 둘러싼 논쟁

2009년 중국의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기존의 산하이관에서 랴오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의 후산[虎山]으로 변경하며,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를 종래의 6,352km에서 8,851km로 수정해서 발표했다. 곧 명나라 때에 후금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산하이관 동쪽으로 랴오닝성의 진저우[錦州], 안산[鞍山], 랴오양[遼陽], 선양[瀋陽], 푸순[撫順]을 거쳐 후산[虎山]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연장해서 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2년에는 명나라 때의 장성만이 아니라 진ㆍ한 등 역대 왕조에서 세워진 장성들을 모두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21,196km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국가문물국의 주장은 만주가 예로부터 중국의 일부였음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후금과의 대립 과정에서 이 지역에 요새가 세워진 것을 장성의 연장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랴오닝성 지역에서 복구 작업을 벌이면서 과거 연(燕)나라와 고구려(高句麗) 시대의 유적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후산[虎山]을 고구려 때의 박작성(泊灼城) 유적지로 보고 있는데, 중국이 만리장성의 일부임을 내세우기 위해 이곳에 후산장성[虎山長城]을 새로 만들면서 고구려의 유적지를 훼손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
  • > > >

관련동영상 2

  • 만리장성 동영상 1
    출처: doopedia
  • 만리장성 동영상 2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