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사회당대회

만국사회당대회

[ 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 , 萬國社會黨大會 ]

요약 세계 각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조직의 대표들이 모인 국제회의.

제2인터내셔널(Second International)이 결성된 1889년부터 세계 각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조직의 대표들이 모여서 열린 국제회의이다. 제2인터내셔널 때인 1889년부터 1912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열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부터 1917년까지는 전쟁에 반대하는 제2인터내셔널의 소수파 정당과 조직들이 모여 3회에 걸쳐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부터 1920년 사이에도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해 3회에 걸쳐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시기

제2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국제회의는 1889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프랑스의 파리에서 '국제노동자대회(International Workers Congresses of Paris)'라는 명칭으로 열렸으며, 20개 나라에서 4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5월 1일이 국제노동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노동절로 정해졌고, 8시간 노동제ㆍ보통선거권ㆍ사회주의자의 의회 참가ㆍ상비군 폐지 등이 주장되었다.

제2차 국제회의는 1891년 8월 3일부터 7일까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국제사회주의노동자대회(International Socialist Labor Congress of Brussels)'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노동조건을 위한 입법의 요구. 국제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조직화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제3차 국제회의는 1893년 8월 9일부터 13일까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대회(Zürich Socialist and Labour Congress)'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엥겔스가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직접 행동이 아니라 의회 진출에 의한 조건의 개선이 주요 행동 방침으로 선언되었다.

제4차 국제회의는 1896년 7월 26일부터 31일까지 영국의 런던에서 '국제사회주의노동자와 노동조합 대회(International Socialist Workers and Trade Union Congress)'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축출이 결의되어 제2인터내셔널에서 독일사회민주당의 영향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5차 국제회의는 1900년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프랑스의 파리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의 결의로 제2인터내셔널 사무국이 설치되었고,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밀랑(Alexandre Millerand, 1859∼1943)의 사례처럼 사회주의자가 내각의 각료로서 참여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제6차 국제회의는 1904년 8월 14일부터 20일까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민족문제와 제국주의, 전쟁 등이 주로 논의되었으며, 인도 국민회의의 창설자인 나오로지(Dadabhai Naoroji, 1825∼1917)가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제7차 국제회의는 1907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 프랑스 대표로 참여한 귀스타브 에르베(Gustave Hervé, 1871∼1944)는 '노동자는 자국 정부의 전쟁 기도에 반란과 총파업으로 맞서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하였고,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로 참여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그 내용에 지지하면서 '전쟁을 혁명으로 전환시킨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것은 ①의회에서 군비 축소와 상비군 철폐를 위해 노력하고, ②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고, ③전쟁이 일어난 경우에는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과 동시에 전쟁 때문에 발생한 위기를 이용해 자본주의의 철폐를 촉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제8차 국제회의는 1910년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1908년에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해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선포되었다.

제9차 국제회의는 1912년 11월 24일부터 25일까지 스위스의 바젤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제1차 발칸전쟁이 일어난 것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히 소집되었기 때문에 '긴급 대회(Extraordinary Congress)'라고 불린다. 이 대회에서는 전쟁에 대한 제2인터내셔널의 기본 태도를 천명한 1907년의 '슈투트가르트 결의'가 다시 확인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1913년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이 정부의 전시 예산을 둘러싸고 분열되면서 제2인터내셔널의 결속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1914년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하면서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인터내셔널 사무국은 8월 9일에 파리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한다는 것 이외에 전쟁을 막기 위한 어떤 방침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전쟁 반대파를 이끌던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가 암살되었고,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던 독일사회민주당은 8월 4일 독일제국의회에서 당내 소수파의 반대를 무시하고 정부의 전시예산에 협력하였다. 뒤이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도 마찬가지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제2인터내셔널에 속한 사회주의 정당들과 조직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와해되었다.

그러자 전쟁에 반대하던 소수파는 1915년 9월 5일부터 8일까지 스위스의 침머발트에서 국제회의를 열어 반전운동을 공동으로 조직하려 했다.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 때 벌어진 사회주의 정당과 조직들의 국제적인 반전 활동을 '침머발트 운동(Zimmerwald Movement)'이라고 한다. 이들은 1916년 4월 23일부터 30일까지 스위스의 키엔탈(Kienthal), 1917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노르웨이의 스톡홀름에서 잇달아 국제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에 반대하고 독자적인 국제조직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리는 '코민테른(Comintern)'이 모스크바에서 결성되었고, 전쟁에 반대하던 제2인터내셔널의 소수파는 대부분 이에 합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그 결과 1919년 4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규약이 승인되었고, 6월과 9월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배상 등에 관한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과 '생제르맹조약(Treaty of Saint-Germain-en-Laye)'이 체결되었다. 독일사회민주당 등은 이러한 전후 처리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에 나섰다.

이들은 1919년 2월 3일부터 8일까지 스위스의 베른에 모여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 방안과 전후 처리 문제 등에 관해 협의하였다. 베른 대회(Berne Conference)에서의 협의를 기초로 '국제사회당위원회(International Socialist Commission)'가 구성되었는데, 이렇게 재건된 국제조직을 '베른 인터내셔널(Berne Internationa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세력은 뒤이어 1919년 8월 1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의 루체른에서 국제회의를 열었다. 루체른 대회(Lucerne Conference)에서는 패전국에 지나친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며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을 비판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더 많은 나라들이 참여해 스스로의 이익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국제연맹에도 더욱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루체른 대회에서는 전쟁 포로와 헝가리ㆍ아르메니아ㆍ그리스ㆍ인도ㆍ리투아니아 등의 문제와 함께 한국에 관해서도 특별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루체른 대회는 이 특별결의안에서 ①한국 국민에 대한 일본의 억압과 권리 침해를 비판하였고, ②국제연맹에 한국을 회원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였으며, ③한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의안의 채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리강회회의에 참여시키기 위해 파견한 조소앙(趙素昻)이 루체른 대회에 참석해 한국사회당 명의로 8월 8일에 〈한국독립 승인요구서〉를 제출한 것에 기초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1920년 7월 31일부터 8월 6일까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국제회의를 열어 새로운 국제조직의 강령을 결의하였다. 제네바 대회(Geneva Congress)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개념은 국가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다른 사회 계급이 공동으로 행사하는 힘으로 간주한다"며 '보통선거권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를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점진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밝혀 볼셰비즘에 기초한 코민테른의 노선에 반대하는 태도를 명확히 하였다. 아울러 국제연맹의 창설에 찬성하지만, 베르사유조약에 기초한 국제연맹 체제는 인정할 수 없다며 "모든 국가는 예외 없이 즉시 승인되어야" 하고, "국제연맹이 더 넓은 기능과 효과적인 통제 수단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국제노동사무소의 설립과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국가산업협의회의 구성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 움직임은 1923년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Labour and Socialist International)'을 결성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역참조항목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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